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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향촌 사족들의 굳건한 기초체력

by 신동훈 識 202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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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조선 후기 사족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드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방사족에 대해 현재 과대평가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향촌의 사족들이 체계적으로 중앙정부에 간섭하고 

이들과 길항하며 존속한 기간은 성종대 이후 백여년간 영남 지역 사족들이 

이른바 도통을 내세우며 문묘종사를 관철하였던 기간, 이 시기가 거의 유일 무이하며

이 시기를 빼고 보면 서울과 경기 지역이 지방을 항상 압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조선시대 내내 위 그림처럼 문과 급제자수 절반이 서울 근방에서 나왔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조선시대 중후기 정치사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향촌 사족들을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을 움직인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대대로 서울과 근교에 살며 자기들끼리 혼맥을 형성하고

왕실 종친과도 혼인관계를 주고 받으며 계속 번영했다는 말이다. 

서울의 인구는 조선시대 당시 전국 인구의 3프로에 불과한데, 

여기서 문과급제자의 절반 가까이가 나왔으니, 

향촌의 사족들이 붕당정치를 주도하며 조선을 좌지우지했다는 우리의 선입견은 완전히 그릇된 셈이다. 

영남사족들의 경우, 조선 후기 들어 가지는 정치적 소외와 대결의식의 대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 대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옳은데, 

전국 인구 불과 3프로 정도인데도 문과 급제자의 절반 가까이 양산한 서울지역과 

전국 인구의 20프로 가까운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도 문과 급제자의 10프로 간신히 넘는 정도를 차지하던 영남지역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할 것이다. 

(그나마 영남 지역이 10프로를 넘었을 뿐, 나머지 지역은 모두 10프로도 안 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향촌 사족을 중심으로 조선의 정치를 설명하는 지금의 관행은 고쳐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사족은 조선이 망하는 순간까지도 중앙에 대한 대결의식을 버리지 않고

향촌에서의 우위를 상실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는데, 그 기초체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경상도 지역 호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지역 호적을 보면,

그럴 듯한 관직이 직역에 적히지 않고 유학호만 달고도 (아마도 소과 입격 정도는 했을 수 있겠다)

집안에 수백 명 노비를 거느린 사람이 동네마다 18세기 초중반까지도 여전히 많이 보이는 바, 

이들이야말로 문과 급제 없이, 큰 벼슬 없이도 너끈히 향촌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바로 이 지역 사족들의 이러한 경제력이야말로 이들이 중앙에서 퇴조하고도

자기 앞마당 나와바리에서 조선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수백년을 더 버틴 힘이었음이 틀림없겠다.

그렇다면 중앙의 권력과 무관하게 자기 동네에서 먹히는 영향력 만으로도 수백년을 버티는 이런 광경은 

과연 조선후기 몇백년에 국한된 이야기였을까? 

천만에. 

아마도 영남사족들이 사림으로 중앙에 진출하기 이전, 

소위 길재에서 내려오는 도통이 경상도 땅에서 배양되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그 기간에도 마찬가지로, 

큰 벼슬 없이도 유학호 하나 달고도 수백명 노비를 부리던 사족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을 것이다. 

향촌 사족에 대한 또 다른 오해의 하나는, 

워낙 이들의 정치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다 보니

이들이 대단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데, 

정작 보면 향촌 사회에서 아무리 잘나가던 씨족들도 

문과는커녕 소과 급제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이들이 많다. 

이 역시 서울을 과소평가하는 것 만큼 조선시대 향촌 사족들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나온 것인데, 

이와는 별개로 향촌 사족들이 벼슬이 있건 없건, 대과급제를 하건 말건 

수백년을 그대로 버티는 기초체력 하나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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