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야산서 고려가 쌓은 왜구 방어용 성곽 흔적(종합)
송고시간 2020-03-05 10:11
박상현 기자
둘레 약 400m…목책 시설·건물터 12기·배수시설도 확인
먼저 이번에 찾아냈다는 고려시대 성곽을 지도에서 찾아본다.
일반 평면지도로 보면 이번 발굴 지점이 이렇다. 묘한 대목이 남성면이라 표시된 지점이 인근에서는 태백산맥이 서쪽으로 병풍으로 둘러친 해안가 거의 유일한 평지라는 사실이다. 여긴 먹을 게 없다. 그런데도 여길 쳤다면, 치는 놈이 현지 사정에 극히 어두운 놈이다.
출토유물. 사진은 모두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이다.
저 동네 털어봤자 뭐가 있겠는가? 과메기 몇점밖에 없다.
한데 성곽이 확인된 지점은 고갯길이다. 남성면소재지에서 부경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내가 현지사정에 어두워 자신은 없으나, 해변가 도로는 현대에 개척됐을 것이요, 과거엔 암벽이지 않았나 싶다.
구글 위성지도를 보면 내가 앞서 한 말이 더욱 명확하다. 그렇다면 저에다가 고려가 성을 쌓은 이유는 뭘까?
왜구일까?
조사단인 성림문화재연구원에서는 그렇다고 말한다.
발굴 양상
그럴까?
이를 판정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성곽시설이 만들어지고 운영된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는 확실한 듯하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됐고 조선시대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만 사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속국도 제65호선 포항~영덕간 건설공사(제3~5공구)에 포함되는 바람에 이곳을 발굴하게 된 모양이라, 이 성곽이 위치하는 지리적 특징으로 조사단은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가량 떨어진 낮은 야산(해발 56m)의 정상부에 자리한 영덕 양성리유적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하여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된 장사해수욕장 일원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는 점을 거론했거니와,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번에 확인된 고려 시대 성곽은 야산 정상부의 약간 아래쪽 부분을 원형으로 돌아가며 땅을 굴착하고 성벽을 쌓아 올린 테뫼식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동쪽 성벽까지 고려하면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성곽은 둘레 약 400m, 내부 면적은 1만㎡가량으로 일반적인 성곽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라 중요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보루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성곽은 존재 가치가 어딨는가?
조사단은 고려말 왜구 방어용이라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간접증거로 들었다.
과거 문헌 기록들에서 이번 양성리유적 성곽이 언급된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 ‘왜구가 강릉부江陵府 및 영덕현盈德縣·덕원현(德原縣)을 노략질하였다.(세가 권43 1372년 6월 6일), 왜구가 송생松生·울진蔚珍·삼척三陟·평해平海·영해寧海·영덕盈德 등지를 침략하고, 삼척현을 불살랐다.(권134 열전 권제47 1381년 3월)’라는 기록을 볼 때, 양성리 일원 주변 역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양성리유적에서 확인된 성곽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가 조망이 유리한 곳에 축조한 당시의 해안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덕을 비롯한 지금의 경상도 동해안 일대에 왜구가 집중 출현하는 시기는 저 고려사 기록들이 증언하듯이 14세기 말이다. 저리 출몰한 왜구도 이내 소멸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성곽을 왜구와 연결한 것이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남쪽 성벽...외부인지 내부인지 아리까리?
다만 하나 고려할 점이 있다. 저 동해안변은 왜구가 침구하는 지점이기도 하면서, 그 이전에는 여진이 집중적인 노력질을 일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확인한 성벽이 고려시대 정확히 어느 시점, 혹은 무렵에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진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흔히 우리 뇌리에는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이미지로 각인한 여진은 실은 해전의 명수였다. 하도 뱃놀이를 잘해서 남송 왕조한테는 두려움의 존재였거니와, 실제 그러한 양상은 고려시대에 동해안을 따라 심지어 경주까지 노략질하는 모습이 자주 노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진 사람들이 육로로 동해안변을 따라 남하했겠는가? 배타고 와서 배타고 약탈하고는 돌아갔다.
이는 신라의 동해안 진출을 이해할 때 결정적인 시사를 준다. 신라가 육로를 통해 동해안을 장악했겠는가? 해상이다. 해군이다.
북방에서 여진이 자주 침몰하는 고려시대 양상은 신라가 왜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를 정복해야 했는지 그 답이 있다. 왜였겠는가?
북방 말갈이었다. 울릉도는 말갈 소굴이었다. 그 말갈 전진기지인 울릉도를 정복함으로써 비로소 동해안을 제패한 것이다.
한편 이번에 확인한 영덕 양성리洋城里성은 개괄이 이렇다.
동쪽 성벽 배수시설. 안쪽에서 본 모습
야산 정상부 약간 아래쪽 부분을 원형으로 돌아가며 땅을 파고는 성벽을 쌓아 올린 이른바 테뫼식 산성이다. 다만 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동쪽 성벽까지 고려하면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이 혼합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둘레는 약 400m, 내부 면적은 1만㎡가량으로 규모가 적은 편이라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보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는 토석혼축 방식으로 쌓았다. 현존하는 높이는 2.6m, 너비가 7m 정도. 성 안쪽에 해당하는 내벽은 땅을 파지 않고 자연지형에 30∼50㎝가량 되는 산돌과 냇돌을 3~5단 정도 안으로 경사지게 들여쌓기했다.
동벽. 밖에서 본 모습
반면 지대가 낮은 아래쪽 외벽은 원래 지형 일부분을 수직으로 자른 후 바깥쪽으로 산돌과 냇돌을 쌓고 그 안쪽으로는 점토와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토를 20차례 이상 엇갈리도록 수평(판축형태)으로 다져 넣어 쌓았다.
남쪽과 남동쪽 성벽 외벽 바깥쪽에서는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420~470㎝)으로 편평한 냇돌을 두었으니, 목책 기둥을 놓기 위한 시설로 추정한다.
동벽
이로 볼 적에 양성리 성곽은 성벽 외벽에 보조적 방어 시설인 목책木柵을 두른 형태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목책 관련 시설 주변으로 불에 그슬린 흔적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책은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곽 내부에서는 창고와 망루시설 등으로 추정하는 건물터 12곳, 그리고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시설 등이 드러났다. 해안을 조망하는 성곽 정상 쪽에 평면 사각형인 망루를 만들고, 그 동쪽으로 온돌을 갖춘 건물 4동을 만들었다.
북벽
남쪽 성벽 안쪽을 따라서는 사각형 건물터 7기가 일렬로 확인됐으니, 이 중 일부는 화재로 망실된 후 다시 만든 건물로 추정한다.
4호 건물지라고 명명한 곳 안쪽에서는 디딜방아 시설과 함께 불탄 쌀이 다량으로 확인돼 곡식 창고가 아니었던가 한다.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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