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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주요 출품작과 그 해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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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글과 그림으로 소통한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   

o 기  간: 2023. 12. 8.(금)~2024. 3. 10.(일)
o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
o 전시품: <삽살개>, <화성원행도>,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보물) 등 54건 88점
 


도1. 『감란록勘亂錄』, 송인명宋寅明(1689-1746) 등 편찬, 1729년, 종이에 목판인쇄, 접은 면 32.5×20.5cm, 국립중앙박물관. 

영조는 즉위 초 온건파 소론과 함께 국정을 운영했다. 급진파 소론 등이 일으킨 무신란(1728년)이 일어나자 박문수 등 온건파 소론이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밝혔다.

영조는 이 책에서 반란의 근본적 원인을 붕당으로 돌렸다. 이처럼 서적을 출판하고 배포해 국정 운영 방침을 명확히 하는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2. 『천의소감 언해闡義昭鑑諺解』, 김재로金在魯(1682-1759) 등 편찬, 1756년, 종이에 목판인쇄, 접은 면 35.4×23.2cm,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이 걸린 사건을 수습하던 중 소론 일부가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하자 영조는 소론을 대규모로 처형했다. 이를 ‘을해옥사乙亥獄事’라 한다.

영조는 이 사건과 경종과 자신의 관계, 즉위 과정의 합법성에 대해 더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해 책을 활자로 간행해 주요 사고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듬해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제작해 독자층을 넓혔다. 
 


도3. 〈탕평비 탑본蕩平碑搨本〉, 영조英祖 1742년, 종이에 탑본, 각 140.0×60.0cm, 한신대학교 박물관 

여덟 살인 사도세자가 조선 최고의 학교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세자의 입학 행사가 진행되기에 앞서 성균관 유생들 중 당색이 다른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조는 유생들을 불러 훈계한 뒤 탕평을 의미를 밝히는 글을 직접 짓고 써서 비석으로 만들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황명 숭정 기원후 115년 되는 임술년(1742) 봄 3월 26일 직접 써서 반수교 옆에 세우라고 명하다. 위 여덟 글자(周而弗比 比而弗周)는 성인의 가르침이요, 아래의 열두 글자(乃君子之公心 寔小人之私意)는 지금 시대를 개탄하고 다음 세대가 노력하도록 만드는 뜻이다.(皇朝崇禎紀元後百十五年歲壬戌春三月二十六日手書 命竪泮水橋傍. 上八字 是聖訓 下十二字 乃嗟今時勉來世之意也)”. 
 

 
도4. 〈삽살개尨狗圖〉, 그림: 김두량金斗樑(1696-1763) 1743년, 글·글씨 영조英祖, 1743년, 종이에 엷은 색, 35.0×45.0cm, 개인 소장,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털이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다. 삽살개가 이토록 사납게 표현된 이유는 그림 위 영조가 직접 쓴 시에서 알 수 있다.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때나 짖는 삽살개는 영조의 눈에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였다.

영조는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柴門夜直 是爾之任 如何途上 晝亦若此)”라고 적어 탕평을 따르지 않는 신하를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삽살개에 비유했다. 

 


도5(앞). 〈박문수 분무공신 전신상朴文秀 奮武功臣 全身像〉, 진재해秦再奚(?-1735) 추정, 1728년, 비단에 색, 165.3×100.0cm, 개인 소장(천안박물관 기탁), 보물

도6(뒤). 〈박문수 분무공신 반신상朴文秀 奮武功臣 半身像〉, 작가 모름, 1750년, 비단에 색, 40.2×28.2cm, 개인 소장, 보물

영조 왕세제 때 교육을 담당한 박문수(1691-1756)는 경제 관료로 균역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해결하는 묘책을 내는 등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했다.

무신란을 진압한 공으로 초상화를 제작할 때, 당대 최고 초상화가 진재해가 직접 그를 보면서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갈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을 엷게 칠하고 음영은 좀 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하는 18세기 전반 초상화 표현 방식대로 그려져 있다.
박문수의 건의로 무신란 공신 초상화가 1750년 다시 제작되었다.

이때 상반신까지만 그려 초상화 한 부는 첩으로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다른 한 부는 다른 초상과 함께 첩으로 꾸며 충훈부에 보관했다.

박문수 38세 초상에 비해 60세 초상에서는 수염이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졌다.
 

도7.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 정조正祖, 1791년, 비단에 먹, 78.0×161.0cm, 국립진주박물관, 1997년 김용두 기증, 보물

정조는 가까운 신하에게 시를 많이 써 주었다. 근신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시로 앞길을 격려했다.

정조가 “정성을 다해 죽기로 맹세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평가한 정민시(1745-1800)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정조가 이 시를 짓고 손수 썼다.

모란, 박쥐 등 문양이 있는 고운 분홍색 비단에 주저함 없이 유려하게 글씨를 썼다. 1790년대 정조의 필치는 이전과 다르게 안정되고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는 아끼는 신하들에게 시를 선물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도8 〈심환지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도록 명하는 편지〉(1798년 1월 11일 밤),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 2책, 정조正祖, 1798, 종이에 먹, 접은 면 7.0×35.2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정조는 편지로 명확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가 1796년부터 1800년까지 노론의 영수 심환지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 297통으로 국정 운영에 있어 정조의 속내를 알 수 있다.

정조는 조정 관리의 인사 행정을 한 날 밤 인사 담당 이조판서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관리의 임명이 잘 되었다고 전하는 한편, 그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도록 지시했다.

정조의 지시대로 이틀 후 심환지는 사직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는 모습을 보였음을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9. 〈주부자 시의도朱夫子詩意圖〉 6폭 병풍,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 1799년, 비단에 색, 각 폭 125.0×40.5cm 
개인 소장 

남송 주자(1130-1200)의 시를 단원 김홍도가 그려 정조에게 바친 작품이다. 정조는 주자가 공자 이후 일인자라며 높이 평가했고, 이 시대에 맞는 선비가 되려면 주자의 시를 배우라고 했다.

김홍도는 시 문구를 꼼꼼하게 묘사하면서도 서정성을 잘 살렸다. 김홍도 특유의 탁월한 공간 구성 능력, 인물과 산수를 표현하는 유려한 붓질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도11. 〈어첩을 봉안하는 행렬御帖奉安圖〉,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 제9·10면,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등 5인 1719-1720년,  비단에 색, 43.8×67.6cm, 국립중앙박물관, 2003년 송성문 기증, 국보 

숙종의 기로소 입사를 기념해 그림 여러 점으로 행사를 기록했다. 숙종의 존호가 적힌 어첩을 기로소에 봉안하러 가는 행렬 그림이 첫 번째 그림이다. 

행렬은 모두 세 줄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행렬은 왕의 의장기를 앞세우고 있고, 가운데 행렬에 항로와 어첩을 실은 가마가 있다.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이 위·아래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이전 궁중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요소이다.
 


도12. 〈영수각에서 거행한 영조의 기로소 입사靈壽閣親臨圖〉,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제31·32면, 장득만張得萬(1684-1764), 장경주張敬周(1710-?) 등 4인, 1744년, 비단에 색, 43.8×67.6cm, 국립중앙박물관 

태조와 숙종의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에 영수각이 세워졌다. 그림 오른쪽 건물이 영수각으로 영수각 감실문이 열려 있고, 책상 위에 그 어첩이 놓여 있는 모습이다.

기로소 입사에 성공한 영조가 이 어첩에 휘호를 남기며 자신이 태조와 숙종을 이은 정당한 왕위계승자임을 드러냈다.
 


도13. 〈진하도陳賀圖〉 8폭 병풍, 작가 모름, 1783년, 비단에 색(제1-6면) 비단에 먹(제7·8면), 각 폭 54.0×152.0cm, 국립중앙박물관

도13-1 인정정 내 규장각 신하들이 엎드린 모습

1782년(정조 6) 11월 정조와 의빈 성씨(?-1786) 사이에서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가 태어났다. 3개월 뒤 세자를 원자 元子로 책봉하면서 정조가 선조의 덕으로 원자가 태어났다며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와 혜경궁惠慶宮 홍씨(1735-1816) 등에게 존귀한 칭호인 존호尊號를 올렸다.

문무대신이 모여 존호 올린 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병풍 좌측에 명단에 규장각 신하들 이름이 적혀 있으며, 이 행사에서 그들이 실질적 업무를 담당했다.

이 행사 때 인정전 전각에서 어좌 가까이에 자리했다. 이 관원들을 비롯해 창덕궁 인정전 전각과 앞뜰에 수많은 신하들이 세로로 또는 가로로 줄을 지어 있으며 왕을 향하고 있다.

정조는 영조에 이어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질서를 이루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탕평한 세상을 꿈꾸었다. 
 

도14. 장조 추상존호 금인莊祖追上尊號金印, 1795년, 구리 합금에 금도금, 9.9×9.9×8.5cm, 국립고궁박물관 
보물·세계기록유산  

1795년(정조 19) 1월 정조가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고자 세 번째 존호를 올리며 만든 도장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에게 윤리를 밝게 드러내고 큰 모범이 되었으며 천명의 터전을 닦아 아름다움을 드러냈다는 뜻의 존호 ‘장륜융범 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다.

여덟 자 존호와 금인金印은 임금과 왕비에게 올리는 것이 전례였으나 정조는 사도세자의 덕을 찬양하고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관철했다.  
 

도15.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 8폭 병풍, 최득현崔得賢, 김득신金得臣(1754-1822) 등 7인, 1795년, 비단에 색, 각 폭 151.8×66.2cm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부터 윤2월 16일까지 7박 8일 동 안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 화성華城에 다녀왔다.

이를 모두 8폭의 그림에 담았는데, 각 폭의 주제는 제1폭 <화성 향교를 참배하다>, 제2폭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다>, 제3폭 <봉수당에서 회갑연을 열다>, 제4폭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열다>, 제5폭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 제6폭 <득중정에서 활쏘기와 불꽃놀이>, 제7폭 <한양으로 돌아가는 행렬>, 제8폭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다>이다. 

정조가 뜻했듯이 왕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고 백성들은 편안한 탕평한 세상을 구현했다. 이를 위해 위계질서에 따라 등장인물을 차등 있게 배치했다.

화면 상단에 공자 위패가 있는 대성전이나 왕 또는 혜경궁이 위치한 화성 행궁 전각을 배치했다.

그 아래에 신하들이 줄 지어 질서정연하게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림 아래쪽 구경 나온 백성들은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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