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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옛 글씨를 보다가] 고우古友 최린崔麟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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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근대는 참 파란만장했다. 그만큼 많은 인물이 나타났고 스러져갔다. 역사에 향기로운 이름을 남긴 이들만큼이나, 더러운 발자국을 남긴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어떤 한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어째서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지, 그들이 남긴 다양한 면모를 두루 살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우古友 최린崔麟(1878-1958) 글씨를 감상하며 그런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귀한 작품을 보여주시고 사진촬영과 게재를 허락해주신 소장자께 감사드린다).

최린은 대한제국 황실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보성전문학교 교장, 천도교 종법사宗法師, 계명구락부 이사를 역임한 당대 일류급 지식인이었다. 또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으로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고 해방 후엔 반민특위 재판정에 서게 된다. 그런 그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옛 말에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는데, 그의 글씨를 보며 떠오르는 인상과 그 속의 정보들을 늘어놓아보고자 한다.

물 흐르듯이 능숙하게 써내려갔다. 붓놀림에 별로 막힘이 없다. 글자 모양을 크게 의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글자와 글자의 조화가 상당하다.

추상같이 꼿꼿하다거나 거칠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차라리 귀엽다는 표현이 맞겠다. 힘을 주지 않고 다소 가볍게 썼는데, 마지막 획에 특히 힘이 좀 빠져보인다. 그래도 꽤나 매력적이고, 나름의 멋도 갖췄다.

나혜석이 왜 반했는지 알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 글씨가 담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마음이 좀 무거워진다.


 

 



글은 강상수심천첩산江上愁心千疊山으로 시작하는 동파東坡 소식蘇軾(1037-1101)의 시 <서왕정국소장연강첩장도書王定國所藏烟江疊嶂圖>다.

동파와 같은 시기의 화가이자 부마도위(황제의 사위)였던 왕선王詵이 그린 <연강첩장도>란 그림에 덧붙인 시인데, 그 분위기가 의미심장하다.



근심스런 마음 강가의 천 겹 산이런가
허공에 뜬 푸른 산이 구름이나 안개 같도다
산인가 구름인가 멀어서 알 수 없더니
안개 사라지고 구름 흩어지니 산이 의연하여라
다만 보이는 건 푸르른 두 벼랑 사이 어둡고 험한 골짜기
그 안에 여러 갈래 길이 있어 샘물이 날아오르네
숲 감돌고 바위 감싸며 숨었다 다시 나타나니
골짜기 어귀로 내려와 콸콸대는 냇물 되었다네
냇물 잔잔하고 산이 열리며 숲이 끝나는 곳에
작은 다리 건너 시골 주막이 산 앞에 기대었구나
나그네는 길 끝에서 큰 나무를 벗어나는데
하늘을 머금은 강에는 한 조각 고깃배 둥실
사군使君은 이 그림을 어디서 얻으셨는고
붓 끝을 이어가며 맑고 고움을 분별하였네
알지 못하겠다! 인간세상 어디에 이런 경개 있는지
있다면 가가지고 두 이랑 밭을 사려네
그대 보지 못했는가? 무창武昌과 번구樊口의 그윽하고 빼어난 곳
동파 선생이 다섯 해를 머물렀음을
봄바람 강물 흔드는데 하늘은 막막도 하고
저녁구름 비를 거두니 산은 곱디고와라
단풍나무에 나는 까마귀는 물과 더불어 자고
취해서 잠을 자다 큰 솔이 떨구는 눈에 놀란다
흐르는 물에 뜬 복사꽃 인간세상에도 있는데
무릉인들 어찌 반드시 모두 신선만 있으리오
강산은 맑고 비었어도 나는 진토塵土에 있나니
비록 떠나갈 길 있어도 찾을 인연 없다오
그대에게 이 그림 돌려주며 세 번 탄식하였소
산 속의 벗은 응당 나를 부르는 <귀래편歸來篇> 지었으리

 

본문 옆 관지를 보면 "을유년 단양절(단오)에 옥봉산玉鳳山 금란각金蘭閣에서 무료해 병든 팔을 시험했다. 古友崔麟"이라 쓰고 끝을 맺었다.

옥봉산이란 이름의 산은 한국에 없는데, 혹 일본 도쿄 근처 옥봉산인지 모르겠다. 주목되는 것은 '을유년', 그리고 '고우최린'이다. 을유년은 1945년, 바로 광복 그해다. 을유년 단오는 양력으로 6월 14일, 광복 두 달 전이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극에 달했을 무렵이다. 그때, 두 달 뒤를 알지 못하고 '무료'했다라...그러면서도 창씨개명으로 고친 이름 佳山麟이 아니라 崔麟이란 이름을 썼다. 그의 내면에서 그는 여전히 '최린'이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관지가 들어갈 자리를 지나치게 위로 끌어당긴 때문인지 이름자 아래로 여백이 너무 남는다. 도서를 찍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데, 어쩐지 《주역》의 마지막 괘인 미제未濟가 떠오른다.

"어린 여우가 냇물을 건너다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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