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문단을 주름잡은 계곡溪谷 장유張維(1587~1638)가 붓 가는 대로 써서 모은 글 《계곡만필谿谷漫筆》을 읽다가 그 제2권에서 다음 일화를 마주했으니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묘비를 미리 지어 놓았고, 오윤겸은 임종 때에 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李元翼在世時預撰墓碑吳允謙臨終遺命勿立碑]]
이상李相 원익元翼과 오상吳相) 윤겸允謙은 모두 학덕이 높은 원로대신이었는데, 이상의 명성이 더욱 중하였다. 한데 이상이 생존시에 이준李埈) 숙평叔平한테 자신의 묘비墓碑를 미리 지어 놓도록 부탁하니, 그 뜻은 대체로 자신을 너무 미화美化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으나 숙평이 지은 글을 보면 칭찬하는 말이 굉장했다.
반면에 오상은 임종臨終에 즈음해 비碑를 세우지도 말고 시호謚號도 청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러고 보면 두 공公은 행동이 완전히 상반한다고 하겠는데, 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상李相이 이 점에 있어서는 오상吳相한데 한 수 물려야 할 것이다.”고 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7
[李元翼在世時預撰墓碑吳允謙臨終遺命勿立碑]
李相元翼,吳相允謙。皆耆舊宿德。而李相名益重。李相在世時。屬李埈叔平預撰墓碑。蓋不欲其溢美。而李作稱道甚盛。吳相臨終。遺命勿立碑。勿請諡。二公所爲正相反。而論者謂李相於此。當輸吳相一着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2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오윤겸吳允謙(1559~1636)은 생몰연대에서 보듯이 같은 시대를 살았고, 둘 다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학문이나 정계 모두 중추를 형성한 대신들이다. 계곡은 이들에 견주어 각기 마흔살과 서른살 정도 어렸지만, 두 사람이 워낙 아흔살 여든살로 장수하고 계곡 자신은 기껏 쉰살을 갓 넘기고는 가 버리는 바람에 계곡 역시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
오윤겸은 널리 알려졌듯이 본관이 해주로, 그 자신 이렇다 할 벼슬은 하지 못하고 처사로 지내면서도 임진왜란 생생실기인 《쇄미록瑣尾錄》 저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 아들이라, 실제 《쇄미록》 곳곳에도 오윤겸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희문과 오윤겸 부자를 필두로 하는 이 집안 추탄공파楸灘公派 공동묘지가 경기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5(오산로61번길 29)에 있는지라 이곳은 내가 일찍이 답사까지 한 일이 있거니와
《계곡만필》에서 저 대목을 접하고는 문득 오윤겸 묘에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아리까리 아리숑숑해졌으니,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자신이 없었으니,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용인시 학예연구사 이서현한테 SOS를 쳤으니, 묻기를 진짜로 오윤겸 묘에 신도비가 없던가 했던 것이니
그날이 일요일이었던 지난 20일이라, 마침 서현 군은 코로나 관련 일로 교회 점검차 근무 중이었으니, 그도 자신이 없다면서 그러면 현장에 한번 가 볼까요? 하더니만 진짜로 얼마 안 있어 현장 출동을 한 듯, 관련 사진을 잔뜩 찍어 보내왔으니 보니, 진짜로 그의 묘에는 신도비가 없고, 대신 근자에 문중에서 세운 신도비인지 묘역비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묘에는 신도비는 없고 대신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돌덩이 표식인 묘표墓表만 있을 뿐이다.
영상까지 역임한 사람으로서 참말로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에 견주어 오리 이원익은 생전에 지인한테 부탁해 그 자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쓰게 했다 하거니와, 오리 무덤이 아마 광명 아닐까 싶은데, 내가 그의 무덤을 가 봤던가 아닌가 역시나 아리숑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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