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율곡의 경장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우리 유학사에서 이 경장론을 역설하였던 사람으로는 조광조(趙光祖) 외에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이의 역사철학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시기는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의 3기로 구분된다. 역사의 전개에서 일단 창업이 이루어지면, 그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전수하는 수성의 시기가 오게 되고, 수성의 시기가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정신과 문물제도가 병들게 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오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에 경장을 해야 하는데, 경장할 때가 되어서 경장을 하지 못하면 나라에 큰 병폐가 생기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역사관 속에서 그는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규정하고, 사회와 정치의 숙폐(宿弊)를 지양하고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기 위해 한 개인이나 기성의 관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시무(時務)를 밝게 알고 국사(國事)를 염려하는 사류(士類)에 의해 나라의 최고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경제사(經濟司) 창설을 주장한 것도 경장론의 한 보기이다. 경장론의 내용을 정책적으로 요약하여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를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저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에서 ① 상하간에 신의의 실지가 없음(上下無交孚之實), ② 신하가 일을 담당하는 실지가 없음(臣隣無任事之實), ③ 경연강의가 성취되지 않음(經筵無成就之實), ④ 어진이를 초대함이 이루어지지 않음(招賢無成就之實), ⑤ 재난을 만나도 하늘에 응하는 실지가 없음(遇災無應天之實), ⑥ 모든 정책이 백성을 구제하는 실지가 없음(群策無救民之實), ⑦ 사람의 마음이 선으로 향하는 실지가 없음(人心無向善之實)을 들어, 이와 같은 나라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도 근본적인 경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 경장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정치나 학문의 사고방식에서 단순히 권위에 얽매이거나 유속(流俗)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자주적 비판정신을 가질 것, ② 국민들의 생활고를 시급히 해결할 것, ③ 교육과 교육제도의 합리적 운영 및 교육자 우대 등 일대 교육혁신을 단행할 것, ④ 계층간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 데서 오는 사회적 폐습을 혁파할 것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이의 경장정책은 크게 쓰여지지 못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동서당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가의 위기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옮김)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위 율곡의 경장론은 내용을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어, 과연 이런 이야기가 정말 율곡이 하고자 한 경장론의 실체가 맞느냐 하는 것이다.
율곡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직설적인 사람으로
저렇게 모호한 이야기를 즐겨하는 양반이 아니라는 데서 더더욱 저 이야기가 경장론의 실체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율곡의 경장론은 구체적으로는 군역과 관련이 있는 개혁이며, 그가 말했다는 십만양병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
율곡은 별세하기 전에도 마지막까지 손에 잡고 있던 것이 결국 국방정책으로,
군역을 부과하려 해도 도대체 이를 부과할 대상이 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군액이 점점 축소되어 유사시 동원할 병력이 절대 부족이라는 점을 절감하고,
이를 혁신하기 위해 군역제 개편, 양반에 군역부과, 노비숫자 축소 등
기본적으로 군역을 담당할 계층의 숫자를 늘리는 방법은 결국
군역 자체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확실하다고 믿는 바다.
다만 이건 필자의 추정일 뿐이지만,
율곡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이러한 경장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스스로를 북송의 구법당에 자임하고,
율곡을 왕안석의 신법당 총수쯤으로 모는 일이 아니었을까.
율곡의 경장론은 기본적으로 건국이래 계속 내려오던 구법을 혁신하는 것으로,
왕안석과 같은 신법당 사류로 몰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하겠다.
필자는 율곡의 직설적 성격과는 달리,
저 경장론이라는 것이 구체적 혁신안 없이 모호한 원칙론만 남게 된 이유가,
그의 개혁안이 밝혀지면 스스로를 왕안석의 아류 정도로 공격받을 것이라 두려워해서였다고 추정한다.
율곡이 사망한 해가 1584년으로 임란 발발 때까지 겨우 8년 정도 남은 시점이었는데,
경장론을 그의 주장대로 시행하여 군역이 개편되었다면 과연 상황은 달라졌을까.
참으로 궁금한 상황에서 그는 지병으로 급사하게 되어
결국 그 경장론은 시행되지 못한 채 임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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