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다시피 고려시대에는 심지어는 왕족에도 적서차별이 심하였다.
서자로 태어나는 경우 왕족들도 머리 깎아 중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다. 있는 집안에서는 많은 아들 중 한 명은 거의가 출가했다. 이들은 금수저라 들어가면서 이미 고위 승직이 되었다.]
적자가 아닌 경우 확실히 정해진 안정적 신분이 주어지지 않았다.
앞에서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국성인 왕씨가 조선 후기 국성인 이씨보다 그 숫자나 후손 세력이 훨씬 못한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하겠다.
이 때문에 조선 건국과 함께 왕씨를 척결했다고 하지만,
그 숫자는 15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고 보면
조선의 국성 이씨가 크게 떨친 데는 종친의 체계적 관리와 보호가 큰 역할을 했다 하겠다.
조선은 왕의 자손에게는 몇 대 동안 국정 참여를 원천적으로 막은 반면
이들에게 과전법 체제 내에서 재물과 토지를 반급하며
적자 서자 모두 비록 차이는 있지만 안정적으로 사족으로 존립할 수 있게 배려했으니,
태종의 경우에는 자신의 서녀를 처음에 사족과 혼인시키려 했을 때
고려시대에 준하여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족 집안 하나를 완전히 풍비박산 내어
왕의 아들 딸이라면 서자서녀라도 사족집안으로 존속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사실 자신의 아들 딸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태종은 노비제에 대해서도 노비종부법을 주장하여, 아버지가 노비가 아니라면 자손들이 노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으니,
자신의 아들딸이 서자 서녀라도 사족에서 빠지지 않도록 하고, 왕의 아들 딸로 대접받게 한 것과
노비종부법은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랬던 것이 시대가 내려가 성종대가 되면 노비종모법이 완전히 국법으로 굳어졌으니,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결국 경제적 문제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왜 조선 초기의 사족들은 노비가 없으면 자신들의 땅을 경작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결국 노비 같이 유지 비용이 최소로 들더라도
그 비용을 제외하면 거의 무료나 다름 없이 공짜 사역을 시킬 수 있는 노비가 아니라면
이익을 낼 수 없게 농업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노예에 준하는 대접을 해 줘도 농사 지어주는 사람이 노비로 자신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는 한은
도저히 그 땅을 경작할 수도, 거기서 이익을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주-전호제를 쉽게 생각하지만,
소작하는 지주-전호제도 어느 정도 토지에서 농업생산성이 보장되어야 유지가 되는 것이지
조선 전기의 토지생산력은 소작농을 유지할 정도의 생산성도 확보가 안 되었던 까닭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필자는 태종이 노비종부법을 주장하고,
세종 성종이 노비종모제를 선택했다고 해서
태종이 특별히 인간적인 왕이고 세종 성종이 잔악한 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노비종모제로 일정 숫자의 노비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나라의 토지를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농업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상황은 결국 조선후기 이앙법과 개간 등으로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비로소 지주-전호제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니,
대략 17-18세기 연간에 농업생산력의 상승이 있고, 이를 바탕삼아 18세기 중엽부터 활발한 노비 사역에 기반한 농장이
비로소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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