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인 서리지역과 천주교회사
공소는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곳이지만 가까운 지역 내에 거주하는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장소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용인지역에는 61개에 이르는 공소가 있었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용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성지, 첫 사목활동지인 은이성지 등 천주교 관련 장소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2018년 원삼면 학일리 고초골에 있는 '고초골공소'가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재되면서 비로소 용인의 천주교 문화유산이 처음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곳인 김가항성당이 2016년 은이성지에 복원 건립되었고, 2020년 용인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내륙지역에 속하는 용인의 신앙공동체[교우촌]는 대부분 산골에 들어섰다.
이 가운데 용인 서리지역은 지형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고, 지리적으로는 용인, 이천, 화성, 안성, 진천 등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박해를 피해 살아야 했던 신앙인들에게는 화전(火田) 생활 및 가마와 숯을 만들어 경제적인 생계 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실제로 용인 서리지역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서리고려백자요지'를 비롯해 고려~조선후기까지 40여 개소에 이르는 가마터가 확인된 곳이다.
이런 서리에 '심부고개(신부고개)', '신부터', '붉은고개' 등의 지명이 내려오는데, 모두 천주교 관련 유래가 전한다.
'심부고개(신부고개)'는 서리 하반곡마을에서 화성시 동탄면 신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신부가 사목하기 위해 넘나들었다고 전한다.
'신부터'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화전을 파던 농민에 의해 성물((聖物)이 발견되었고, 병인년 박해 때 페레올 고 주교가 피신하여 살던 곳"으로, "이곳에 밭을 일구던 농부가 성서와 묵주가 들어 있는 항아리를 발견하고 교우 집에 전달해준 사실도 있었으나 유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손에서 분실되었다"고 전한다.(<<용인천주교회사>>, <<용인성당 50년사>> 참조)
'붉은고개'는 "어느 신부님이었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밤에 성사를 주고 돌아오는 신부님이 호환(虎患)을 당해 피를 흘린 장소"라는 유래, 또는 "포졸들이 교우 집을 습격하였으나, 압송하는 도중 행보가 어려운 사람들의 처리가 곤란하자 이들을 돌로 쳐 죽여서 이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 턱을 흥건히 적시어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라는 유래가 전한다.
2. 용인 서리지역의 천주교 전래
용인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20년을 전후해서 양지면 '은이'와 이동면 묵리의 '용인 굴암'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30~1840년 대에 굴암을 중심으로 인근에 교우촌이 집중되었다.
1850년대 이후 용인 서북부 지역에 위치한 손골(수지구 동천동)에 신앙공동체가 확인되는데, 손골은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광교산 산골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갓 조선에 입국한 신임 선교사들이 몇 달간 머물면서 조선말과 조선풍습을 익히고 사목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는 곳이 되었다.
이와같이 적어도 1820년대부터 용인지역에는 산골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86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탄압과 시련 속에서도 교우촌, 공소로서 존속하면서 사제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서리지역에 언제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병인박해 순교자 가운데 세 명이 용인 서리의 더우골에서 거주하였다. 정덕구(야고보, 1844~1867)는 더우골에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정필립보는 더우골에 살다가 1867년 순교하였다.
윤자호(바오로, 1809~1868)는 충청도 노성(논산) 출신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이사하다가 용인 서리 '더우골'에서도 살았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을 통해 용인 서리지역은 정덕구가 태어난 1844년에 이미 천주교 신자가 살았고, 정필립보가 체포된 1866년에도 신자가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3. 용인 서리지역 천주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가치 : 사리틔 공소
용인 서리지역 관할은 1895년 미리내 본당, 1927년 양지본당 이후 용인 본당을 거쳐 현재는 천리본당에 속하고 있다.
앞에 간단히 설명했듯이, 용인 서리지역은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곳으로 7개의 공소가 만들어졌는데, 1898~1913년 사이에 모두 폐지되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서리에 남아 있는 유일한고 공소가 바로 '사리틔 공소'(정확히는 사리틔 공소 강당)이다.
※ 공소명이 '사리틔'인 이유는 추정컨대, '서리'가 '사리'로, 언덕, 고개를 뜻하는 '치'가 '틔'로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고개도 '신부고개'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리틔 공소 강당은 1898년 서리지역의 증가하는 신자의 신앙생활을 위해 초대 공소 회장인 조면(바오로)가 자신의 집 앞마당의 빈터에 신축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엔 초가로 신축하였는데, 신축 후 80여 년이 경과하면서 기초가 약해지고 지붕에 비가새는 등 상태가 안좋아지자 1978년 목조와가로 옛 모습과 똑같은 구조로 개축, 복원하였다.
평면 'ㄱ자형' 형태로, 정면 4칸과 측면 3칸 규모, 5량 구조,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898년 당시 모습 그대로 건축하였다. 사리틔공소 강당을 개축하면서 초가의 서까래였던 부재 2개를 온돌방 서까래에 사용했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는 개항기를 거치면서 지어진 한옥식 성당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생활공간과 전례공간의 구분,
둘째, 성당은 ㄱ자형이나 +자형으로 배치하기도 했으나 전례공간은 대부분 장방형
셋째, 온돌보다 마룻바닥을 많이 사용
넷째, 당시 유교적인 풍토에서 남녀 간은 한자리 동석하는 것을 금지
여기에서 사리틔공소 강당은 당시 시대적 상황인 남녀유별을 반영하기 위해 ㄱ자로 꺾이는 부분 1칸에 제대를 설치하고 오른편 3칸은 남자, 왼쪽 2칸은 여자가 자리하여 서로 볼 수 없는 구조로 배치하여, 인위적으로 남녀 자리를 구분하던 것과 다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개항기 성당이나 공소 강당의 종교 건축이 대부분 장방형인데, 사리틔 공소 강당은 거의 유일하게 'ㄱ자형'으로 건축되었고, 툇마루의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통해 개방된 공간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가치가 매우 크다.
사리틔공소는 비록 최초 건축 이후 80여 년이 지난 1978년 개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항기 종교건축에서 찾아보기 드물게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건축된만큼 뛰어난 근대건축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천리성당에서 관할하고 있는데,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리틔공소는 용인 서리지역의 천주교 신앙의 구심점이 되어 왔던 건축물로서 상징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사리틔공소의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될 수 있도록 교구와 지자체 간의 협업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인시, <<용인 천주교유적 학술조사 보고서>>, 2018.
최중인, <용인 서리 지역의 천주교 형성과 사리틔 공소에 관한 연구>, <<교회사학>>제18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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