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군 위청衛靑(?~BC 106) 무덤 정상에서 한漢 무제武帝 유철劉徹 능을 백댄서 삼아 박았다.
구릉 정상엔 누군가 다녀간 흔적 한 무더기를 남겼더라.
유철이 주도한 흉노 복수전은 전쟁 영웅의 탄생을 알렸다.
그 선두주자가 위청.
그런 그도 밀려나는 장강 물결처럼 뒷방 뇐네가 되었다.
권력은 점점 조카 곽거병霍去病(140~117 BC)에게로 옮아갔다.
위청 집 문전엔 파리가 날리더니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곽거병의 권력도 그의 변변찮은 이복동생 곽광霍光(?~BC 68)의 그것에는 미칠 수 없었다.
유철이 죽자 상관걸上官桀(?~BC 80), 김일제金日磾(134~86 BC)와 더불어 어린 후사 소제昭帝를 보필하는 고명대신顧命大臣 셋 중 하나가 된 곽광은 소제 사후 유철의 서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가, 그가 개판이라는 판단이 들자 서슴없이 황제를 폐위한 은殷 재상 이윤伊尹의 고사를 따라, 쿠데타를 일으켜 27일만인가 황제를 폐위하고는 해혼후海昏侯로 격하해서 내친다.
그 창읍왕 해혼후 무덤이 근자에 중국에서 발굴되어 난리가 났다.
곽광은 생평을 전장과 권력투쟁에서 살았다.
고명대신 중 상관걸과 쟁투하면서 그마저 내치고, 김일제까지 사망하자 권력 정점을 구가했으니, 이런 그의 집안도 그의 죽음과 더불어 권력을 시기한 자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게 인생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그래도 위청에서 곽광에 이르는 저 집안은 한 세대 이상을 구가했으니, 원없이 살았노라 저승에서 외칠지 모른다.
(2018. 2. 8)
***
중국에서는 대체로 황제 무덤 주변으로 생전에 그를 보필한 주요 신하들 무덤을 쓰는데, 이를 황제를 호위하는 무덤이라 해서 흔히 배장묘陪葬墓라 하거니와, 이를 영어로는 satelite tomb(s)라 옮기곤 하는데, 영어 쪽 표현이 그 성격을 비교적 더 확연하게 드러낸다.
덧붙여 이 황제릉 주변으로는 신도시를 하나씩 개발하곤 했으니, 이를 능시陵市 혹은 능읍陵邑과 같은 말로 표현하곤 한다.
황제릉에는 이름이 부여되거니와, 무제 유철이 묻힌 곳을 무릉茂陵이라 한다. 이 무릉 주변으로 배장묘가 120여 개인가 만들었으니, 저 시대 봉사한 신하들 중에서도 위청, 곽거병, 그리고 김일제는 특별대우를 받아 세 곳에 나란히 거대한 봉분을 조성했으니, 생전 지위에 따라 가장 높은 위청, 그 다음 높은 곽거병, 맨꼬바리 김일제 순서로 봉분 크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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