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연재할 생각은 없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한 번 정주행해 보겠습니다. 모쪼록 즐겁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투탕카멘 Tutankhamen (재위 기원전 1336~1327)이 9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250년간 나일강 유역을 지배한 화려한 파라오 왕국 이집트가 번영의 절정에서 급격한 쇠퇴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의 부왕 아멘호텝 4세 혹은 아켄아텐 Amenhotep IV / Akhenaten (재위 기원전 1352~1336)은 소위 ‘일신교 혁명 Monotheistic Revolution’으로 유명한 ‘이단왕 heretic king’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파라오가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와 같은 왕권과 교황권 간 충돌이 발생할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부 테베 Thebes의 주신 아문-레 Amun-Re 와 그를 모시는 신관단 priesthood 의 권력은 전례 없이 비대해지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은 급진적인 정책을 통해 종교에 대한 왕의 독점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이때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이 선택한 새로운 신은 생명을 주는 빛이 뻗어 나오는 태양원반인 아텐 Aten 이었습니다. 그는 아텐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의 신전을 폐쇄하고 신관단을 해체함으로써 이집트 문명이 수천 년 간 유지한 공고한 다신교 체제를 그 기반부터 흔들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그러나 이런 ‘종교개혁’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투탕카멘은 부왕의 실패한 개혁을 중단하고 이집트를 과거의 다신교 체제로 다시 되돌리는 전무후무한 과업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투탕카멘의 개혁칙령』 비문은 즉위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투탕카멘의 개혁칙령』 (Urk. IV, 22,5-9): “폐하[투탕카멘]께서 왕위에 오르셨을 때 신들과 여신들의 신전과 성읍은 (이집트 최남단의) 엘레판틴에서 (최북단) 삼각주 습지에 이르기까지 무너져 내렸으며 그들의 성지는 잡초 무성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지성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변했고 그들의 신전은 오솔길이 되어버렸다. 신들이 이 땅을 버리시니 이집트의 국경을 넓히려 자히[시리아]에 군대를 파견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염원이 있어 신께 기도를 올려도 그분께서는 오시지 않았다. 같은 방법으로 여신께 탄원해도 그녀는 오시지 않았다.”
요컨대 지상에서 신들이 머물며 지상의 삶을 축복하던 아름다운 신국 神國 이집트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의 잘못된 정책으로 신들이 모두 떠난 영적인 황무지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신들은 해외원정과 같이 이집트의 국가적 사업에도, 개인들의 사적인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고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할 사람은 새로운 왕 투탕카멘밖에 없었습니다.
『투탕카멘의 개혁칙령』 (Urk. IV, 22,10-12): “그러나 시간이 지나 폐하[투탕카멘]께서 부왕[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의 왕좌에 오르셨고 호루스의 양안(兩岸)[이집트]을 다스리시도다. 케메트[검은 땅: 경작지]와 데쉐레트[붉은 땅: 사막]가 폐하의 통치 아래 놓였으며 모든 땅이 폐하의 권능에 굴복하였다. 폐하께서는 태양신께서 천계에 계신 것처럼 아아-케페르-카-레[투트모세 1세]의 영지 안의 왕궁에서 땅을 다스리셨으며 양안의 정사를 돌보셨다. 폐하께서는 심장이 권고하는 바대로 모든 선행을 고려하여 아버지 아문을 위한 방도를 모색하시던 차, 호박금(琥珀金)으로 그의 고귀한 성상을 만드셨으니 ... ...”
여기서 투탕카멘은 ‘종교개혁’ 이후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고 통치권과 질서를 다시 수립하는 군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재위 3년 투탕카멘은 아문-레를 중심으로 한 기존 다신교 체제로 회귀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때 왕과 왕비 이름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투탕카멘과 앙케센아문 Ankhesenamun 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투탕카멘은 원래 이름이 “아텐/태양원반의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뜻인 “투탕카텐”이었으며 왕비는 원래 이름이 “아텐/태양원반을 위해 그녀는 살 것이다”라는 의미인 “앙케센파아텐”이었습니다.
아텐 신앙을 포기하고 아문 신앙으로 회귀하겠다는 왕실 의지를 가장 잘 보여줄 조치였습니다.
투탕카멘은 또한 폐쇄한 신전들을 다시 복구하고 아문-레의 신관단을 비롯한 기존 신관들의 지위를 복원해주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기간 중 가장 큰 탄압을 받은 아문-레를 위해 이전보다 더 크고 화려한 신상을 제작함으로써 아문-레를 최고신으로 하는 다신교 체제가 복원되었다는 메시지를 이집트 전역에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재위 10년 투탕카멘은 18세 어린 나이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년왕 사망 이후 왕위는 총리대신 아이 Ay (재위 기원전 1327~1323)와 군 총책임자 호렘헵 Horemheb (재위 기원전 1323~1295)한테 계승되었습니다.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던 호렘헵은 자신의 왕위를 부관이었던 람세스 1세 Ramesses I (기원전 1295~1294)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제18 왕조가 끝나고 제19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람세스 1세 뒤를 이은 세티 1세(Sety I: 기원전 1294-1279년)와 람세스 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 치세에 이르러 이집트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이전의 정치경제적으로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는 아비도스 Abydos 에 건립한 장제전 葬祭殿 (mortuary temple)에 자신들보다 먼저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파라오들의 이름이 나열된 왕명록 king list 을 새겨 넣게 했는데 이때 ‘종교개혁’과 연관된 왕들, 즉 아멘호텝 4세·투탕카멘·아이는 왕명표에서 제외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왕이 남긴 왕명표에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아버지이자 투탕카멘 할아버지인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기원전 1390~1352) 다음에 바로 람세스 1세가 표기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1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이집트를 지배한 투탕카멘은 후대 이집트인들과 역사가들에게 완전히 잊히게 되었습니다.
#투탕카멘 #하워드카터 #아켄아텐 #종교개혁
*** 첨부사진은 이 블로그 편집자가 붙였다.
*** previous article ***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1) 투탕카멘 왕묘 발굴 이야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킹 추장의 롱하우스 longhouse와 한반도 청동기 마을의 길쭉이 건물 (0) | 2022.12.01 |
---|---|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2) 영생을 위한 왕묘 – 신왕국시대 왕가의 계곡 (0) | 2022.11.30 |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1) 투탕카멘 왕묘 발굴 이야기 (0) | 2022.11.26 |
물륵공명物勒工名, 품질보증 (0) | 2022.11.24 |
고려 왕자가 구축한 동아시아 해양실크로드 (0) | 2022.1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