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2) 영생을 위한 왕묘 – 신왕국시대 왕가의 계곡

by taeshik.kim 2022. 11. 30.
반응형

<구글위성지도로 보는 왕가의 계곡>

왕가의 계곡 · Luxor, 룩소르 주 1340420 이집트

★★★★★ · 고대 유적지

www.google.com



오늘날 룩소르 Luxor 시에 해당하는 테베 Thebes 나일강 서쪽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s 에 처음 왕묘가 건설되기는 신왕국시대 제18 왕조 초기(기원전 1470년) 무렵입니다. 이후 400년 동안 이곳은 신왕국시대 파라오들의 전용 공동묘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왕의 총애를 받은 고위 관리나 유모, 그리고 왕의 친인척 등 왕이 아닌 사람들도 이곳에 묻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후 언급될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기원전 1390-1352년)의 장인 장모 유야 Yuya 와 투야 Tuya 입니다.

테베와 왕가의 계곡. 좀 요상한 점이 있다. 동쪽 홍해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 중 하나라는 점이 그것이다.


테베가 홍해와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모르겠다. 단, 이 홍해로 가는 지점에 산지가 보인다. 이것이 장애였을까?
왕가의 계곡은 나일강이 감돌아 흐르는 지점 중에서도 상류에서 흘러내린 물살이 그대로 들이치는 지점에 자리잡았다. 물론 현장을 가 보면 저 왕가의 계곡은 실상 산지라, 홍수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을 것이다. 더불어 나일강을 s자형으로 몰아낸 저 지점이 비교적 높은 산이 가로막고 섰다는 점도 유의하면 좋지 않나 생각해 본다.



신왕국시대 초기에 왕가의 계곡에 건설된 왕릉 입구는 산기슭 틈에 숨어 일단 무덤이 봉인된 다음에는 그 위치를 알 수 없게 한 반면, 후대 왕묘는 커다란 입구 시설 때문에 그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지하 암석을 파내어 만든 암굴묘인 이들 왕묘 역시 시간 흐름에 따라 스타일이 조금씩 변했습니다. 초기 왕묘들은 중앙에 90도로 구부러진 축과 가파른 계단으로 구성되지만 제20 왕조 람세스시대 Ramesside Period (1186-1069년) 에 축조된 후기 왕묘들은 복도와 각 방이 완만한 경사를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됐습니다.
왕묘에 조성된 지하 방들은 벽화나 부조 등으로 장식되었는데 벽에 그리거나 새긴 각종 형상과 텍스트는 신들의 영역인 천상과 내세를 묘사합니다.

아울러 원전에서 발췌해 벽면 이곳저곳에 새긴 다양한 장례문서는 왕묘 주인인 파라오가 지하세계에서 마주할 모든 위험을 무사히 극복하고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왕가의 계곡 전경(위). 정면에 "뿔"을 뜻하는 엘-꾸른(Al-Qurn) 산이 보인다.(아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계 내부를 자세히 묘사한 장례문서들이 새롭게 창작되어 왕묘 벽면에 새겨지기 시작했는데 명계 구조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들 장례문서를 통칭하여 《암두아트 Amduat》 (직역하면 “두아트 = 명계에 존재하는 자/것”) 혹은 《하계下界의 서書》 라 부릅니다.

이들 《하계의 서》는 명계를 12개 영역으로 나누는데 이들 영역은 밤을 구성하는 12시간에 각각 대응합니다. 아울러 람세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계 구조 중에서도 더 세분화한 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담긴 《관문의 서 Book of Gates》라든가 《동굴의 서 Book of Caverns》 와 같은 매우 전문적인 문서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왕가의 계곡에서 파라오를 위한 지하 암굴묘를 건축하는 데는 숙련공들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왕묘는 위치가 외부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비밀이었으므로 숙련공들을 외부와 격리된 곳에 따로 모여 살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결과 왕가의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오늘날 데이르 엘-메디나 Deir el-Medina 지역에 왕묘 건설을 전담하는 장인들과 그 가족을 위한 정착촌이 조성되었습니다.

장인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졌는데 왕묘 중심축을 기준으로 각각 오른쪽과 왼쪽 건축과 장식을 담당했습니다. (각 팀은 선원들에게 사용되던 용어를 빌려 ‘좌현조’와 ‘우현조’로 불렸습니다.)

왕가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들은 부드러운 석회암을 긁어내어 방과 복도를 만들고 벽면을 다듬은 후 그 위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림과 문자를 그리거나 새겨 넣었습니다. 만일 왕묘가 한창 건설 중인 상황에서 왕이 사망하면 미완성인 상태로 매장과 장례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이들은 이제 막 즉위한 다음 왕의 무덤 건설에 곧바로 착수했습니다.

왕가의 계곡 왕묘 배치 양상



데이르 엘-메디나에서는 장인들이 석회암 석편(오스트라콘) 조각에 붓으로 쓴 문서와 연습 삼아 그린 데생 등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간단한 편지나 전갈, 메모, 스케치 등을 쓰거나 그린 이들 석편은 용도가 다한 후 마을 근처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는데 이런 고대 쓰레기가 현대 학자들에게는 왕묘가 설계되고 축조된 방법, 장인들의 일상생활, 가족 혹은 이웃 간 불화, 각종 질병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제20 왕조 람세스 3세 Ramesses III (기원전 1184-1153년) 재위기에는 테베 서안西岸 왕실 묘역과 귀족 분묘에 대한 도굴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게 되었으며 부패가 만연한 행정조직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면서 왕묘를 건설하기 위해 정부가 고용한 장인들이 밀린 급료에 항의하며 세계 최초의 농성과 파업을 벌이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각주: 람세스 3세 치세 29년 왕묘 건설을 위해 왕실에서 고용한 장인들이 밀을 비롯한 여러 물품 보급이 계속 지연되자 농성과 파업을 벌였습니다. 최초의 농성과 파업은 장인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자신들의 집단 거주지를 떠나 테베 서안 장제전에 머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당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농성과 파업은 일단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이유로 농성과 파업이 여러 번 발생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왕묘 부장품들은 고대 도굴꾼들을 현혹하는데 이들은 장례식이 끝난 뒤 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도굴에 착수하곤 했습니다.

왕가의 계곡 어느 왕릉. 누구 무덤인지는 찾아봐야 함. 암튼 이렇다.


왕묘 저장고에는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제작된 값진 부장품만 아니라 향수·연고·수지·직물 그리고 포도주를 비롯해 실생활에 바로 사용할 만한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열려라 참깨”로 유명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등장하는 보물로 가득 찬 동굴은 왕가의 계곡에 조성된 왕묘를 모티프로 한 것입니다. 실제로 도굴꾼들에게는 이들 왕묘가 보물로 가득 찬 동굴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람세스 시대 왕실 묘역을 관리하던 관리들이 체포된 도굴꾼을 심문하고 작성한 조서를 보면 도굴꾼들이 묘역 관리인들을 매수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도굴꾼 심문과정에는 고문이 사용되었는데 그 때문에 도굴꾼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백을 하곤 했습니다.

관리인들이 공동묘지를 순찰하면서 왕묘 상태를 점검했지만 왕실 묘역 치안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1881년 데이르 엘-메디나 근처 귀족분묘(TT 320)에서 총 50구의 왕·왕비·왕족 미라가 발견되었습니다. 제3 중간기 제21 왕조(기원전 1069-945년) 관리들이 아문의 고위 신관 피네젬 2세(Pinedjem II: 기원전 990-969년)의 분묘였던 이곳을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의 미라를 도굴꾼들로부터 은닉할 비밀 장소로 사용한 것인데 이는 당시 왕실묘역 치안상황이 왕묘를 폐쇄하고 왕실 미라를 한 곳에 모아 숨겨 놓아야 할 정도로 악화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투탕카멘 왕묘 현실인 듯한데....내가 찍고도 자신이 없으니...



그러나 이 와중에도 투탕카멘 왕묘 KV 62는 심각한 도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파라오 장인들이 새로운 왕묘를 조성하면서 흘러내린 공사 잔해들이 투탕카멘 왕묘 입구를 막아버렸는데 그 위에 돌로 만든 오두막이 들어서면서 왕의 마지막 안식처는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가 체계적인 탐사 작업을 통해 발굴하기 전까지 완벽하게 잊혀졌기 때문입니다.


*** 편집자注 ***


관련 도판과 그 설명은 모조리 편집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몸통글 작성자인 유성환 박사는 저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사진은 모조리 편집자가 촬영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