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포하노라"
삼일절마다 되뇌이고, 한때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기미독립선언서> 첫 구절이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울 때는 이 글의 저자를 '민족대표 33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를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했더랬다.
지은이의 삶 때문이라고.
그 틀을 잡은 지은이-지금은 '공약 3장'도 함께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가 바로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다.
젊어서 동경삼재東京三才란 찬사를 받을 만큼 천재성을 발휘한 그였다.
그랬기에 개화기부터 일제강점 중기까지 한국 문학, 출판, 역사연구, 언론 등 실로 각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년 이후,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꽤 오래 산 인물임에도 육당 친필은 귀하다.
가짜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이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지, 이규보(1168-1241) 선생의 친구 매호梅湖 진화(1181?-1220?)의 문집 <매호유고>의 서문이었다.
단 육필은 아니고, 1938년 가을 <매호유고>를 후손들이 중간重刊하면서 그 서문을 육당에게 받아 그대로 판에 새겨 찍은 것이다.
퍽 솜씨 좋은 각수였는지 목판본임에도 제법 붓글씨 맛이 난다.
능필能筆이라 해도 좋을 만큼 능숙하고 유려하며 또 대범한데, 한편으로는 획의 처음이나 끝이 슬쩍슬쩍 과장되고 기우는 부분도 엿보인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건 마지막이다.
쓴 때는 쇼와昭和 무인년 초가을이고, 쓴 이는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 동주東州 최남선이라지 않는가.
무인년은 1938년이다. 그때의 건국대학이란 지금 건대입구에 있는 그게 아니라 일제가 만주 신경(장춘)에 세운 건국대학이다.
최남선은 이해 봄 건국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1943년까지 재임했다.
1938년 시점의 그, 육당의 낯이 이 몇 글자로 드러나는 셈이다.
쇼와 연호를 대두擡頭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라고 해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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