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윤동주와 송몽규

by 초야잠필 2023. 9. 19.
반응형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민족시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이 두 사람은 민족시인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죽을 때까지 저항한 민족시인이라는 것인데-. 

사실 윤동주와 송몽규는 80년대 대학가에 흔하게 존재한 젊은이들과 별차이가 없다. 

시대가 암울하여 비운에 명을 달리하였을 뿐이다. 

이 양반들은 그 고비만 넘겼으면 아마도 해방 이후 적당한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갔을 것이고, 

천수를 다하고 인생을 마쳤을 수도 있다. 

요즘 태어났다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생각하고 고민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대개 격렬한 저항으로 유명해 진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는 경외하지만 뭔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느낌이 커서 그만큼 멀게 느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두 사람은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는 이름표에 앞서 

그 감정에 공명하며 요절이 불쌍하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 일본으로 건너가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 배우고자 했을 텐데, 

요즘으로 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피체되어 이국땅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혼백이 있다면 정말 억울했을 것임에 틀림없고, 

이 양반들에 대한 생각은 역시 경외감 이전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양반들은 학벌로 볼 때 이때 피체되어 옥사하지 않았더라도,
학병 때문에 일본 유학을 중단해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윤동주 송몽규가 일본 유학을 떠났을 즈음에는 이미 전문학교 이상 고학력자에 대한 학병지원령이 발동하여

43년에 이미 지원자를 뽑기 시작했고, 이들이 경찰에 체포된 것이 43년 7월, 

그리고 학병지원자가 입영한 것이 44년 1월이었다. 

특히 이들은 문과생이었는데 학병은 문과생을 우선적으로 동원한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이 당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더라도 44년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학병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시기상 감행하면 안 되는 유학이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떠난 유학. 배우고자 한 의욕을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애도할 뿐이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 졸업과 함께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계획했는데, 이때 창씨개명을 동시에 했다. 당시 일본의 대학은 조선인들이 들어가기 바늘구멍이라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송몽규 역시 일본 유학 전 창씨개명을 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인생은 단 몇년만 빨리 태어났거나 늦게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윤동주는 가수 윤형주의 부친 윤영춘 선생과 나이가 한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윤영춘 선생 역시 일본 유학을 거쳐 해방 후 경희대 교수를 지냈는데, 윤동주 역시 이 고비를 넘어 생존하였다면 비슷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아마도 윤동주의 아들도 시인이나 가수로 데뷔했을지도 모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