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방수제와 한강교 준공
한강은 해마다 그 연안에 피해를 입힌 바가 많은 대하천 중 하나로, 특히 경성에 근접한 관계상 일찍이 그 개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25년(大正 14)에는 미증유의 홍수로 용산·뚝섬纛島·영등포 등 연안의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그리하여 1926년(大正15) 이후 3개년 계속사업으로서 220만 원의 예산으로 용산의 방수제防水堤, 1927년(昭和 2) 이후 120만 원의 공사비로 한강교漢江橋의 가설 공사에 착수했다.
1929년(昭和 4)에 둘 다 준공되어 9월 18일 낙성식과 도교식渡橋式을 거행하여, 경성 교외에 훌륭한 경관을 더하게 되었다.
방수제는 신·구新舊 용산을 둘러싼 것으로 총연장 8,000m, 한강교는 총연장 441.6m, 유효 폭 9.1m에 달하고 있다. [636]
2) 그해가 올축년에 해당하므로 '을축년홍수乙丑年洪水'라 한다. 이해에는 4번에 걸친 홍수가 있었는데, 그중 1차
홍수는 7월 7일 대만 부근에 발생한 열대저기압(태풍)이 11일과 12일에 중부 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면서 황해도 이남 지방에 300~500m의 호우가 쏟아져,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범람했다. 1차 홍수의 물이 아직 충분히 빠지기도 전인 7월 14일 2차로 대만 부근에서 열대저기압이 발생해 중국을 거처우리나라 황해 북부 근해를 지나가게 되어 그 우측 반경에 들어간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16~18일 연일 계속 내린 비는 한강과 임진강 분수령 부근에서 650mm에 달했고 이로 인해 임진강과 한강이 크게 범람했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 용산 12.74m로 사상 최고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영등포·용산의 제방이 넘쳐 하안 일대 3만여 정보가 막막한 진흙바다로 되었다. 이때 가장피해가 심했던 곳은 동부이촌동·뚝섬·송파·잠실리·신천리·풍납리 등지였다. 이후 관서 지방과 남부 지방을 더한 총 4회에 걸친 호우로 그해 홍수 피해액은 1억 300만 원에 달했는데,이는 당시조선총독부 1년예산의 58%에 해당하던 것이니 실로 놀라운 피해였고 한강 유역이 가장 심한 피해를 받은 사상 최고의 대흥수였다.
3) 한강대교는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로 건설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개통 초기에는 '제1한강교'라고 블렸다. 1912년에 교량가설계획을 수립한 후, 1917년 10월에 준공되었다. 1925년 7월의 울축년 대홍수로 중간 둑이 유실되어 용산 측 한강소교가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제1차로한강소교를 철폐하고 종래의 둑을 쌓았던 곳까지 연장해 459m의 대다리 가설 공사를 1927년 5월에 착수하여 1929년 9월 준공하고 9월 18일 파교식을 거행했다. 당시 120만 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6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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