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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영문학자·불문학자 고 이가형 선생이 겪은 위안부

by taeshik.kim 2019.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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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전선의 조선인 위안부들. 1944년



내 세대 문학 언저리에 얼쩡 거린 사람 중에는 이가형李佳炯(1921~2001)이라는 이름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식민치하 일본 제국대학 유학도로, 해방 이후에는 대학에서 교수로 교편을 오랫동안 잡은 그는 특히 번역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으니, 그가 옮긴 책이 많았다. 


그의 번역 인생에서 독특한 점은 불문학과 영문학을 아우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의 전력을 볼 때 의문이 좀 풀린다.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다니다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된 그는 1945년에 연합군 포로가 되어 싱가포르 포로수용소 생활 1년을 하면서 영문학으로 바꾸었다. 대학은 중앙대와 국민대에서 봉직했다. 


나 역시 그가 번역한 영문학 혹은 불문학 책으로 한때나마 문학에 심취한 시절이 있었다. 허먼 멜빌 《모비 딕》과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은 그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간단한 약력은 아래 첨부하는 그의 부고 기사를 참고하라)  


이를 그를 내가 사회부 기자 시절인 1997년 인터뷰한 적이 있다.(아래 첨부기사에서는 1995년이라 했는데 아마도 내 기억의 착란인 듯하다.) 학도병에 징집되어 버마전선에 배속된 그는 그 시절 조선여인들이 일하는 위안소를 직접 경험하고,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더구나 그런 경험들을 고스란히 소설 형식을 빌린 문학작품 《분노의 강 : 나의 버마전쟁 1944-45》(慶雲出版社, 1993, 서울)을 통해 증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하여 그런 이가형의 전력을 접하게 되었는가? 역시 아래에 첨부하는 기사 중에 '위안부' 혹은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이 잘못임을 지적한 강만길 선생 논문이 있다. 그의 이 논문은 1997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단행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이라는 책에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개념과  호칭문제」라는 제목으로 수록됐으니, 이 글에서 강만길 선생이 이가형 선생의 저 글을 인용했다. 


그 무렵, 내가 고려대 연구실로 직접 강만길 선생을 찾아갔다. 그 면담 내용은 우리 공장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나갔는데, 여담이나 이 인터뷰가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다. 내가 잘못 보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발언을 그대로 전재했다가, 강 선생이 정대협에서 엄청 얻어터진 것이다. 강 선생이 내 기사로 당신이 매우 곤란해졌다고 하면서, 기사를 좀 바꿔 달라 해서 대체 기사가 나가고 난리 블루스를 추어댄 것이다. 


버마전선의 위안부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정대협에 대한 감정 안 좋다. 난 이 단체 순수한 인권운동 단체로 보지 아니한다. 암튼 그 얘기는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사건에서 다시금 정대협이 권력으로 작동하는 그 어떤 확연한 낌새를 여지없이 확인했다. 


그날 면담에서 나는 이가형 선생 작품 얘기를 꺼내면서 선생한테 여쭙기를 "이가형 선생 인터뷰 하셨어요?" 하니 뜻밖에도 그런 적도 없고 개인적인 면식도 전연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의아했다. 다름 아닌 학도병으로, 그것도 버마전선에서 위안소를 직접 경험한 사람을 인터뷰하지 않았다니 의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서 내가 결심하기를, 내가 직접 이가형 선생을 만나 이 문제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면담이 끝나고서는 아마 교보문고인가로 직행해 문제의 소설을 찾으니, 다행히 창구 직원이 서가 아래칸에서 한 권 있다며 찾아주는데 먼지가 잔뜩 쌓였다. 


당시만 해도 내 독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지라, 냅다 그날로 줄을 박박 쳐가며 그 소설을 읽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이고 실록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그 무대인 미얀마를 갈 생각을 엄두에 두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닿으면 콰이강의 다리도 가 보리라 했다. 


소설에서는 이가형 선생이 조선인위안부들과 '관계'하지 않았다 했는데, 내 느낌으로는 영 뭔가를 숨긴다는 느낌이 많았다. 그래서 반드시 이 점을 본인한테서 확인하고 싶었다. 끝내 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거부했는데, 나는 지금도 믿는다. 이 냥반, 위안부들과 관계했다고 말이다. 


아무튼 소설까지 읽었으니, 이제 직접 이가형 선생을 대면할 일만 남았다. 국민대로 전화를 넣어 어째어째 수소문해서는 기어이 퇴직한 지 오래인 선생 집전화 번호까지 알아냈다. 국민대 명예교수인가 라서 가끔 국민대로 나온다는 걸로 들었다고 기억한다. 


아무튼 연락이 닿아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만나겠다 해서 약속장소를 정했으니, 서울 시내 어떤 지하철역 구내 빵집이었다. 선생이 어디를 가는 길인지, 다녀오는 길인지, 그쪽이 편하다 해서 그쪽으로 정한 것이다. 직접 뵈니, 당시 연세가 이미 팔순에 가까워진 데다가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서 내심 이 냥반 오래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묶어 정리한 것이 아래 첨부하는 인터뷰 기사다.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위안부와 관계하셨습니까? 


한데 이 냥반 희한했다. 책에서는 그런 관계가 없다고 기술했는데 막상 여쭈니 가타부타 답변이 없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그의 표정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문제의 이가형 선생 인터뷰는 오래도록 나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공장 데이터베이스에 저장이 되어있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이후 그 옛날 기사들까지 디비가 구축된 모양이라, 오늘 새벽 혹시나 하고 '이가형'이라는 키워드를 두들기니 뿔싸,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인터뷰 기사가 턱하니 걸리는 게 아닌가? 잃은 자식 다시 찾은 심정이다. 



기사번호 AKR19970618002500004

작성 김태식[사회부] 1997.06.18 10:57:00 수정 [사회부]

송고 안봉태[사회부] 1997.06.18 11:06:00 배부일시 1997.06.18 11:06:00

내용 사회일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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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바고 1차 : 1997.06.18 11:06:00


<어느 학도병이 보고 겪은 종군위안부>


(서울=聯合) "내가 위안소를 찾았을 때 조선인 위안부들은 나를 '오빠'라  부르며 먼저 고향이 어딘지 물었습니다. 목포라 하니까 자신도 고향이 목포라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


李佳炯 국민대 명예교수(76)는 태평양전쟁 말기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미얀마(당시 버마) 전선에 끌려갔다 만난 조선인 위안부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고 말했다.




동경제국대학 불문학부에 재학 중이던 1944년 6월 李 교수는 학도지원병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이역만리 미얀마로 끌려가 해방 직전 연합군의 포로가 돼 귀환하기까지 4∼5차례 조선인 위안부들을 목격했다.


특히 그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하는 위안소라는 곳을 직접 두 번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애환을 듣기도 했다.


미얀마 밀림의 찌는 듯한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던 1944년 9월  '좋은  곳'에 데려가겠다는 일본인 고참에 끌려가다시피 하며 모울메인 시가지를 벗어나 풀밭을 지나 닿은 곳은 언덕 위 검게 칠한 커다란 판자집.


건물 바깥에는 검은 바탕에 하얀 에나멜로 '쓰바기(椿)', '하루에(春江)', '사다코(貞子)'라고 적힌 팻말 3개가 걸려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李교수는 3명의 조선 여인들이 있는데 놀랐다. 그 중 한명은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일본인 고참이 내가 간다고 미리 말을 해놓은 듯 고참병이 조선여인들에게 '약속한 대로 조선인을 데려왔다'고 하자 그들이 와락 달려들었어요. 그들이 제일 먼저 물은 말은 '오빠 고향이 어디냐'는 것이었죠. 내가 목포라고 하니까 아직도 이름이 생생한 정자라는 여자가 자기도 목포라며 기뻐 어쩔 줄 몰라했지요."


조선여인들은 이역만리에서 만난 동포를 위해 술상까지 봐줬다고 한다.


그리고 李교수는 '파트너'가 된 정자로부터 집안이 어려워 음식점 종업원이 됐다가 미얀마까지 오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위안소에 간 두번 모두 결코 조선여인들과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위안부들은 외로워서 그런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고향 얘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위안부들과 함께 한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李교수는 9월 하순 휴양지로 개발된 메미묘라는 곳에서 또 다른 조선인 위안부들을 찾게 된다.


이곳 위안소는 별장으로 쓰이던 버마인 저택을 개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오복녀'를 비롯, 조선여인 서너 명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환대를 받은 李교수는 역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가장 먼저 받았다.


"조선여인들은 유난히 고향 얘기를 많이 했어요. 오죽 고향이 그리웠으면 그랬겠어요."


이름이 오복녀라는 여자로부터 李교수는 동료 위안부들이 연합군의 폭격에 맞아 숨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李교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행렬 제일 앞에 세우고 행군을 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때.


"우리 부대가 퇴각하는 때였는데 아마 남쪽을 가는 다른 일본군 부대를  만났지요. 그런데 행렬 제일 앞에 배낭의 일종인 '륙색'을 짊어진 조선인 위안부 2명이  걸어가는 거예요. 신기한 광경을 보는 것 같았지요.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앞세워 행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李교수는 또 일본 군인들이 위안부들을 '피'라고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인들 사이에서는 '피'는 4가지로 분류됐는데 일본피, 즉 일본인 위안부는 장군용이었고 사병들은 조선인 위안부인 조선피를 제일 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머지 피는 중국피, 버마피였습니다."


그는 조선인 위안부 뿐만 아니라 영화로 유명해진 '콰이강의 다리' 부근에서는 조선인 포로감시요원들도 만났다고 한다. 이들은 나중에 대부분 전범자로 취급됐다.


李 교수는 끝으로 "조선인 위안부들과 포로감시요원, 동료 학도병들의 모습들이 뇌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며 "이들이 당시 힘없던 우리민족의 슬프디 슬픈 모습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을 맺었다.(끝) 


**** 기사 어중간에 보이는 '피'란 실제는 '삐'에 가까운 발음으로 일본삐 조선삐는 프라스터튜트prostitute 창녀를 말한다. 일본식으로 읽어 당시 저리 통용되었다.


AKR20011015001900005 코멘트

작성 김태식[문화부] 2001.10.15 16:49:51 수정 [문화부]

송고 홍혜자[문화부] 2001.10.15 16:57:41 배부일시 2001.10.15 16: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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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형 국민대 명예교수 별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영문학자.·불문학자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이가형(李佳炯) 국민대 명예교수가 지난 11일 오후 4시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서울대병원에 기증됐다.


전남 목포 출신인 고인은 일제 강점기에 도쿄(東京)제국대학  불문과에 재학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버마를 비롯한 동남아 전선에 투입됐다가 1945년에 연합군  포로가 된 뒤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1년간 포로생활을 하고는 1946년 귀국했다.


포로생활을 계기로 불문학에서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중앙대를 거쳐 국민대 대학원장으로 있다가 정년 퇴직했다.


프랑스 행동주의 작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미국 해양소설가 허만 멜빌의 대표작 「모비딕」을 비롯해 많은 번역서를 냈다.


버마전선의 위안부들



말년에는 작가로 돌아서 지난 93년에는 일본 학도병 및 포로생활이라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장편 실화소설 「분노의 강」을 일본어판과 동시에 출간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특히 고인이 생전에 만났고 그 자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한  조선 출신 이른바 위안부들과 그 여인들이 집단수용됐던 위안소에 대한 기록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이에 대해 고인은 1995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소설 속 위안부는 이름만 바꾸었을 뿐 보고 만난 실제 인물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족으로 아들 소설가 원방(필명 이원하)·한우(사업)씨, 딸 수향(국립극장 예술진흥회 이사)씨가 있고 박상철 서울대 의대 교수가 사위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 760-2011.

taeshik@yna.co.kr 

(끝)


AKR19970416004600004 코멘트

작성 김태식[사회부] 1997.04.16 19:22:00 수정 [사회부]

송고 엄기평[사회부] 1997.04.16 20:47:00 배부일시 1997.04.16 20:47:00

내용 사회일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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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바고 1차 : 1997.04.16 20:47:00


姜萬吉교수,"'종군위안부' 명칭은 잘못"


(서울=聯合) 일제치하 일본군에 끌려가 性的 학대를 받았던 여성들을 지칭하는 '종군위안부' 또는 '정신대'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姜萬吉 고려대교수(역사학과)는 역사문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백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에 발표한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개념과  호칭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일본군의 성적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통해서 성적 '위안'을 받은 일본군인을 주체로 하여 붙인  명칭일 뿐"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姜교수는 "이른바 '위안부'들이 군인들에게 '위안'을 제공하는 행위는 대부분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고통 중의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명칭"이라면서 "따라서 적합한 명칭이 다시 고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90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종군위안부' 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루면서 '挺身隊정신대'를 '종군위안부'의 동의어로 인식한 적이 있으나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으므로 '위안부'와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姜교수는 그동안의 연구결과 ▲ 유괴와 인신매매에 의해 ▲ 취직알선에 속아 ▲ 일본군부 및 정부의 강제동원 등 3가지 방법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으며  '위안소'의 경우 일본군대가 직접운영했거나 또 설령 민간업자가 경영했다 해도 실제는 군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다를 바가 없었으며 그들의 생활은 군대의 작전지역 안에서 감금상태에서 군인들의 性상대가 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姜교수는 '자의에 반해서' 동원된 젊은 여인들이 전투지구에 집단적으로 수용되어 심할 경우 하루 수십차례 집단적 성행위를 강요당했으며 군인들과  대열을 같이하여 후퇴하거나 심할 경우 '전사'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군인들의 입장에서 부른 '위안부'란 명칭은 잘못된 것이며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  군대 특유의 비인간성과 잔혹성의 증거로서 현대판 성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 했다.(끝)



버마전선 위안부들에 대한 미군기록


                        

이가형 선생 약력은 다음과 같다. 

李佳炯. 1921. 3. 29 ∼ 2001. 10. 11 


영문학자이자 불문학자. 목포 죽동 출생. 호 안부(雁夫). 1942년 일본 구마모토(熊本高校) 고교 졸업. 1944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버마전선 배치. 연합군에 포로가 되어 1945년 이후 46년까지 싱가포르 수용소에서 근무하고 귀국. 1956~1957 미국 윌리엄스대학교 유학 


1946년 목포고교 교사 

1951년 목포초급상과대학 부교수 

1952년 전남대학교 전임강사 조교수 

1960년 중앙대학교 부교수 교수 

1975년 국민대 교수 

1985 전남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86년 국민대 퇴임 


1975년 영어영문학회 회장

1977년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1979년 추리작가협회 회장(∼1990)

1983년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1985년 국민대학교 대학원 원장

1985년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겸임

1986년 국민대학교 대우교수

1991년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1991년 한국추리작가협회 명예회장(∼1997)


성호문학상(1960), 번역문학상(1972), 국민훈장모란장(1978) 수상


【역서】 왕도(王道)(말로) 사회계약론(루소) 인권론(페인) 깨와 백합(러스킨) 살로메(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화상(畵像)(와일드) 정복자(말로) 모비딕(멜빌) 인간의 조건(말로) 


버마전선의 위안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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