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말.
원나라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고려도 이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 바.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유력자인 이자춘과 비밀리에 접촉한다.
그 당시의 정황이 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기 황후(奇皇后)의 종족(宗族)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몹시 난폭했으며, 황후의 형 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은 쌍성(雙城)의 관리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과 몰래 통하여 서로 당(黨)을 지어 반역을 꾀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우선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라.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015) 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당시 이자춘은 쌍성을 공격하는 고려군에 내응하여 이 땅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가 이성계 집안이 고려의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당시 이자춘의 힘은 쌍성이 아니라 훨씬 그 북쪽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이행리는 원래 두만강 일대에 살다가 여진족에게 쫒겨 함흥 일대로 남하했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여전히 이들의 힘은 훨씬 북쪽 지역까지 정치군사적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실록에 의하면-.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고,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피발(被髮)025) 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冠帶)를 띠게 하고,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를 편호(編戶)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또 추장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공주(孔州)에서 북쪽으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며, 또 학교를 세워서 경서를 가르치게 하니, 문무(文武)의 정치가 이에서 모두 잘되게 되었고, 천 리의 땅이 다 조선의 판도(版圖)로 들어오게 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하였다.
다소 표현에 과장이 있으지는 모르겠지만, 태조연간에 이미 조선은 두만강 유역까지 도달해 군현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이성계가 여진족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쌍성 공략 이전에는 함흥평야도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는데 태조 연간에 이미 두만강에 도달했으니 함경도 한 도를 몽땅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으로 태조 승하 후에는 후퇴하여 두만강으로 재 진출해야 했지만, 함경도 일대가 몽땅 조선의 판도로 들어오게 된 일차적인 공적은 태조 개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사실 태조가 여진족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데 바로 그 때문에 한반도 국가는 좀처럼 넘지 못한 마운령 선을 돌파하여 일약 두만강 선까지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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