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한성백제박물관이 몽촌토성 이른바 집수지集水池(이른바라 하는 이유는 국적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연못이다. 언제까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왜색 말 쓰야는가?)에서 네 번째 삼국시대 목제쟁기를 출토했다고 밝혔거니와,
같은 지점에서 거푸 쟁기를 네 개나 찾은 사실을 이제는 허심히 보아 넘길 수 없다.
왜인가를 이제는 본격으로 탐구해야 할 시점이다.
쟁기가 하나라면 전날 상관한테 졸라 얻어터진 분풀이로 농기구 담당자가 홧김에 서방질하는 심정으로 냅다 연못에다 던져버리는 일로 분풀이를 했다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저 연못에다가 저리 떼거리로 쟁기들을 쑤셔박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점이 조사단도 수상하기는 한지, 저 네 번째 성과를 공개하면서 그 보도문에 이르기를
삼국시대의 쟁기는 대표적인 농기구로 크기가 제일 크다. 당시의 농기구는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혹은 지역단위에서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귀하게 여긴 목제품을 버릴 때는 태우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유실되도록 하였다.
비슷한 맥락으로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빗이 여러 점 출토되는 상황과도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사람의 신체와 접촉한 물건을 태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버렸던 것이다.
당시 쟁기는 제작에 있어 최고의 기술이 필요한 중요한 연장이었기에, 집수지에서 여러 점의 쟁기가 출토되는 것은 단순히 집수지에 쟁기를 폐기한 것이 아닌 쟁기를 통해 풍요를 기원했던 의미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
또한 몽촌토성 집수지에서만 네 점의 쟁기가 출토된 것은 몽촌토성 일대의 경제적 풍요를 유추해 볼 수 있고, 이 일대에서 몽촌토성이 가졌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자세는 좋다 본다. 왜? 왜인가를 스스로 묻기 때문 아니겠는가?
돌파는 언제나 왜 라는 질문에서 돌발하는 법이다.
다만 저 초보하는 질문에 더 초보하는 상정은 어린아해 장난 수준이라, 쟁기 같은 농업 관련 유물만 나왔다 하면 풍요 다산 운위하는 고질하는 일에서 하등 벗어나지 않는다.
이걸 캐고 해명해야 하는 일이 꼭 저들 몫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하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모든 기초 발굴정보를 독점하는 이가 저들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간접으로 접하는 사람들에 견주어 그들만이 내어놓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어떤 민속학 개론서에나 보이는 풍요 운운하는 말로 퉁칠 수는 없다.
이를 해명하는 관건 중 하나가 지금껏 나온 쟁기 4점이 한꺼번에 던져진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시간 격차를 두고 모종의 이유로 매몰된 것인가다.
이건 조사단만 단안할 수 있다.
순차 조사에서 나오는 양태를 보면 시기를 달리할 듯한 느낌을 주지만 이것이 순차별 층위조사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발굴 구역에 따른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나아가 저 양태가 우연인가 필연인가도 판단해야 한다.
시기랑 상관없이 4점이나 출토한 양상을 보면 이는 폐기와 같은 우연이 아니라 모종의 필연으로 봐야 한다.
그 필연이 저네가 추정하는 대로 풍요 운운인지는 현재로서는 단안할 수 없지만, 왜? 를 묻는데서 고고학은 비로서 기예능을 벗어나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구조가 어떻고 그 변화양태가 어떠하며 문화권별 어떤 차이가 있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는 개돼지가 하는 기예능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저걸 모종의 의식과 관련한 것으로 본다는 상정은 저 쟁기 넉 점에서 하나같이 앙꼬가 빠졌다는 사실을 어찌 해명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대두한다.
쟁기 앙꼬는 보습날이다. 그건 철제다. 졸라 비싸다. 그 비싼 부문만 쏙 뺐다.
이걸 우째 봐야 하는가?
엿바까 먹었나?
예능을 할 것인가 궁구를 할 것인가는 이제부터 판가름난다.
나아가 왜 쟁기가 물과 결합했는지도 문제다.
둘을 관통하는 분모야 말할 것도 없이 농업이어니와, 농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지탱하는 의식주 중 식과 관련하는 핵심이다.
혹 저 부재들이 연못 부설과는 관련 없는가?
더불어 나는 매양 몽촌 발굴성과를 보며 궁금한 점이 몽촌이 왕성이라매?
한데 그런 왕성에 웬 마굿간? 물론 저 몽촌을 점유한 정치체가 저것을 왕성 혹은 그 부속 세트로 활용했을 백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구려 신라 또한 있었으니 이 점을 고려해서 살필 것으로 보거니와
이 심각성도 이제는 물어야 한다.
내심 조사단에선 고구려를 상정하지 않나 한다.
보도자료 전문을 첨부한다.
동아시아 최초, 삼국시대 목제쟁기 연속 4회 출토
-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집수지, 2020년 이후 연속 네 번째 쟁기 출토
- 최대길이 170cm 쟁기 포함, 동아시아 최초·최대 규모 연속적 발견
- 각기 다른 모습의 쟁기 발견으로 고대 농업기술사 연구의 대전환 마련
- 쟁기 집중분석 및 입체적 연구 지속 추진…전시 통해 시민 공개 예정
□ 한성백제박물관(관장 김지연)은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네 번째 삼국시대 목제쟁기를 출토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출토된 목제쟁기는 지난 2020년 이후 네 번째 발견된 쟁기로서 동아시아사상 최초이자 최대 수량의 출토 사례다.
○ 한성백제박물관은 ‘2천년 역사도시 서울’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백제왕도유적 발굴조사’를 추진 중이다.
2013년부터는 몽촌토성(백제 왕성)일대의 학술발굴조사를 시작했고, 2015년부터는 석촌동 고분군(백제 왕릉지구)까지 범위를 넓혀 계속해서 조사를 이어오고 있다.
□ 전 세계 쟁기 발굴 사례 중에서는 몽촌토성과 같은 시기의 쟁기로 확인되는 중국의 쟁기가 있으나, 이는 제대로 된 실물 자료가 거의 없고 화상석으로만 그 전모가 확인되고 있다.
쟁기가 동아시아에서 먼저 발달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거의 완벽하게 출토된 이번 몽촌토성 쟁기는 세계 최초의 사례에 가깝다.
※ 화상석 : 석재에 여러 그림을 선각(線刻, 선으로 새기는 것) 혹은 얇은 부조(浮彫,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로 조각한 것
□ 이번에 목제쟁기가 발견된 몽촌토성 집수지는 1,500~1,600년 전 사람들의 ‘물탱크’ 역할을 했던 시설이다. 성내의 용수(用水) 확보 및 식수(食水)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 이번에 출토된 4호 쟁기는 술 부분이 지면과 평행하게 뻗은 ‘눕쟁기’로 추정된다.
눕쟁기는 논과 밭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다. 2022년 출토된 쟁기가 밭농사에만 사용되는 ‘가대기’였던 것과 상반적이다.
또한 쟁기 이외에 쟁기의 손잡이 부분 아래에서 새끼줄도 발견되었다.
○ 함께 발견된 새끼줄은 작년(2023년)에 출토된 3호 쟁기에 연결되어 있던 ‘탕개줄(서로 다른 부분을 연결하기 위해 단단하게 비틀어 죄어 놓은 줄)’과 같은 성격으로 추정된다.
□ 4호 쟁기는 정교하게 제작된 ‘자부지’가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공을 들여 다듬고 특히 끝을 둥근 형태로 만든 것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쟁기 본연의 기능 외에도 다른 부분의 제작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아 당시 농기구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자부지 : 쟁기의 손잡이, 술 끝의 뾰족한 부분을 이르는 말로 경상북도에서는 탁주꼬재이, 잡주지, 평안북도에서는 탑조지라고도 부른다.
□ 한편, 이번 4호 쟁기의 경우 손잡이가 양쪽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양쪽 손잡이는 좌우로 조정을 하며 보습을 통해서 갈아낸 흙을 원하는 방향으로 넘길 수 있었다.
이로써 몽촌토성 집수지는 손잡이가 한쪽에 있는 쟁기와 양쪽에 있는 쟁기, 두 가지 형태의 쟁기 모두를 출토한 역사적인 사례를 기록하게 되었다.
○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출토된 네 점의 쟁기는 아직 보습날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다양한 쟁기의 형태를 통해 고대 쟁기의 전체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시에 구체적인 사용 방법, 삼국시대의 농경 방식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 삼국시대의 쟁기는 대표적인 농기구로 크기가 제일 크다.
당시의 농기구는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혹은 지역단위에서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귀하게 여긴 목제품을 버릴 때는 태우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유실되도록 하였다.
비슷한 맥락으로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빗이 여러 점 출토되는 상황과도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사람의 신체와 접촉한 물건을 태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버렸던 것이다.
□ 당시 쟁기는 제작에 있어 최고의 기술이 필요한 중요한 연장이었기에, 집수지에서 여러 점의 쟁기가 출토되는 것은 단순히 집수지에 쟁기를 폐기한 것이 아닌 쟁기를 통해 풍요를 기원했던 의미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
또한 몽촌토성 집수지에서만 네 점의 쟁기가 출토된 것은 몽촌토성 일대의 경제적 풍요를 유추해 볼 수 있고, 이 일대에서 몽촌토성이 가졌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 한성백제박물관은 출토된 네 점의 쟁기를 각종 첨단기기를 이용해 유기물 분석, 방사성탄소연대분석 등 자연과학적 분석에 나선다.
이를 통해 더욱 다양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 김지연 한성백제박물관장은 “이번 4호 쟁기 출토로 몽촌토성 집수지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수량의 연속 출토 성과를 기록하게 되었다”며 “한성백제박물관은 앞으로 출토된 쟁기에 관한 다양한 학제간 융합연구를 시행하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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