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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본사 감회 몇 가지

by 초야잠필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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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사라는 볼륨 두꺼운 역사를 언급하는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쨌건 관련 내용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이곳에 적어둔다. 

1. 일본사: 생각보다 볼륨이 두텁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역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의 디테일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관련 역사서가 남은 양이 일본이 많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곤란한 것이 야요이 시대라면 우리의 청동기 시대로 발굴의 정도나 남아 있는 역사서의 양은 저기나 여기나 비슷할 텐데도 역사서술의 디테일 면에서 아직도 차이가 많이 난다. 우리 학자들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2. 한일 양국의 인문학 수준차이는 에도시대 학문의 수준차의 연장: 양국 인문학 수준차이가 아직도 있다면 그 차이는 에도시대 학문의 수준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점. 나중에 더 자세히 써 볼 날이 있을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이 학문 수준차이가 많이 벌어진 것은 에도시대 중반 이후 최소한 수백년은 된다는 생각이다. 

3. 일본의 문화적 역량: 결국 전국시대-에도시대가 양국의 차이를 갈랐다는 생각이다. 전국시대 이전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의 역량도 높게 평가하는 전공자들을 보는데 동의 할 수 없다. 당장 에도시대 이전 일본의 문헌 전적에서 필사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쇄물이 많지 않아 대규모 불경은 항상 대륙을 기웃거려야 했던 이유를 보면 자명하다. 일본에서 무가정권시기의 지식인-식자층은 그 수준이나 숫자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 어마어마하게 평가하는 경우도 보는데, 과장이라고 본다. 

4. 한국사: 일본사와 비교하여 한국사의 가장 큰 차이는 "사문서의 소실" 아닐까. 조선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잘 알다시피 육국사 이후 관찬 사서는 편찬되지 않았지만 많은 양의 사문서가 남아 있고 그 사문서가 사실상 해당시기 일본사의 디테일을 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사의 기둥을 이루는 기전체 사서는 막대한 양은 사문서가 남아 있지 않으면 꾸리기 힘든 사서이다. 본기나 세가 표는 어떻게 꾸린다고 해도 열전의 경우 왕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 사문서가 남지 않으면 쓰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전체 사서를 꾸리는것은 사문서의 양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것으로 기사본말체나 편년체보다 훨씬 어려운 체제라고 본다. 고려사의 열전 디테일을 보면, 아마도 막대한 양의 사문서가 조선초기까지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열전을 꾸릴수 있었을 텐데 그 사문서들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수가 없다. 

대략 소회를 적어보았지만 어느정도로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자신이 없다. 다만 기록 삼아 남겨둔다. 

 

삼국지처럼 일본에서는 태평기도 요시카와 에이지의 것이 유명하여 NHK 드라마의 저본은 이 책이다. 아직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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