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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열전 짓기의 어려움

by 초야잠필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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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통사서에서 열전 짓기의 어려움에 대해 앞에 잠깐 써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써 보기로 한다.

사실 기전체라고 하지만 열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본기 (세가), 표 등은 편년체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기록이다.

중앙에서 모아 놓은 기록을 날짜별로 쭉 정리한 후 왕력을 매 해 연두에 표기해 놓은 채 적어 내려가면 편년체, 각 왕별로 권을 나누어 쓰면 기전체의 본기(세가) 부분이 되는 탓이다. 기전체라고 하지만 본기(세가)의 부분은 사실 편년체와 작업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열전이 포함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우선 열전에 입전한 기록들은 정보의 소스가 다르다. 개개인의 역사가 정부를 털어 봐야 나올 리가 없다. 이것은 전부 개인 (집안) 기록의 몫이다.

그리고 그 개인 (가승)의 기록을 중앙에 남아 있는 기록과 대조해야 한다. 전혀 별개의 기원을 가진 기록을 정부기록과 끼워 맞추는 작업이 완성되어야 제대로 된 열전이 나오는 것이다.

기전체라고 하지만 실제로 편년체나 기사본말체와 이 기록물을 가장 크게 구분지어주는 부분은 역시 열전이다.

열전을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리 간단치 않아 그 사회의 기록 수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사기 때부터 이미 열전 입전의 전통이 확실히 자리잡은 중국과 달리 중국 주변의 국가들은 기전체-열전을 거의 집어 넣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 고사기-일본서기는 형식상 기전체의 본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열전이 없다. 일본은 고사기-일본서기의 뒤를 이은 육국사까지도 열전을 거의 입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뿐 아니라 베트남, 유구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의 역사서를 보면 기전체 본기 (세가)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열전이 없다.

베트남은 우리의 삼국사기에 해당하는 기록 "대월사기전서"를 지어, 중국의 "사기"와 같은 위상을 표방했지만 여기도 열전이 없다.

열전을 지어 넣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가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우리나라 역사도 열전을 지어 넣는데 만만치 않은 고생을 했을 것으로 본다.

우선 삼국사기의 열전은 빈약하기 짝이없다. 왜 이런 모양의 열전이 남게 되었는지는 다른 기회를 빌어 약간 더 써 보려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려사는 대단한 책이다. 아마도 동아시아 역사 편찬에서, 중국의 24사의 수준에 가장 근접한 정사가 고려사가 아닌가 하는데, 고려사의 열전은 그만큼 비중이 대단하다.

아마도 고려 사회의 개인-집안 기록을 뒤져 입전했을 것으로 보는 고려사 열전의 분량은 총 137권 중 50권이나 된다.

삼국사기는 총 50권 중 열전이 10권이었는데 그 중 3권이 김유신 전이었다.

고려사는 절대로 만만히 볼 책이 아니다. (위키피디아 사진)

 

*** 편집자주 ***

 

열전이 없으면 본기가 필연적으로 엄청 늘어나게 된다. 열전이 없는 일본서기 이래 일본 육국사가 모조리 가분수가 된 이유다.  중국사는 24사가 모조리 거질이라 해도 본기는 간단하기 짝이 없다. 열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까닭이다. 그만큼 중국사에서는 열전이 중요하다. 

열전이 없는 기전체 사서는 열전 이하 다른 부문들이 포섭해야 하는 내용들을 본기 한 군데 쑤셔박게 된다. 본기라 하지만 중구난방이며 복잡다기를 방불하는 이유다. 

본기는 깐쫑해야 한다. 본기는 실상 연표가 따로 있지만 연표를 겸하는데, 이 연표가 구질구질하면 저리 되고 만다. 

나아가 이 점에서 신라 성덕왕 시절 김대문이 왜 그리 중요한 사가인지를 우리를 점검한다. 그의 행적은 오로지 704년인가 703년 지금의 경기도지사에 해당하는 한산주도독을 지낸 경력이 전부지만, 김부식 증언에 의하면 그가 지은 여러 저술이 그 당대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하거니와, 이름만 남은 그의 저술 중 고승전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승려 열전이었을 것이며, 근자 필사본 형태로 공개된 화랑세기는 글자 그대로 역대 화랑을 지낸 사람들의 순차적인 전기라, 그것이 곧 열전이었던 것이다. 

김유신 열전은 이미 그의 당대에 있었음을 확인하거니와,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가 죽자 그의 무덤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하거니와, 이 신도비가 곧 그의 열전이었다. 그의 현손 김장청이 김유신 열전을 10권으로 썼다 하고, 그것이 곧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3권으로 축약했다 하거니와, 이걸 보면 신라 중대에 이미 적지 않은 열전이 저술 유포되었음을 본다. 

신라 하대로 내려와서는 몇 실물이 남지는 않았지만, 불교계를 중심으로 각 문중 오야붕들은 거의 다 행장이 있었음을 안다. 이 행장들이 곧 열전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삼국사기는 승려 열전은 입전하지 아니했으니, 그 틈바구니를 파고 든 것이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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