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하면 사대주의 역사집필의 화신 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 정황을 조금만 파보면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본기 체제를 도입했다던가, 삼국 어떤 나라에도 정통을 주지 않고 무통론에 입각한 기술을 했다던가, 중국과 한국의 기록이 서로 다를 때 한국 기록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였다던가 하는 점은 이미 잘 알려졌으므로 더 쓰지 않겠다.
기록을 보면 김부식은 사실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그 반대이다.
고려초, 한국사에 대한 정보는 이미 상당히 망실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한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삼국사기를 짓는다고 되어 있으니 당시 사대부들 중 과연 김부식보다 한국사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있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기록을 보면 김부식은 (혹은 그의 집안은) 요즘 말로 하자면 "국제수준을 따라가기 위한 야망이 상당히 컸던" 집안이다.
고려도경을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중국사신 서긍이 김부식의 이름을 보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그 동생의 이름이 김부철, 역시 그래서 그 이름이구나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동파가 죽은 것이 1101년, 동생인 소철이 죽은 것이 1112년인데 김부식이 태어난 해는 1075년, 김부철이 난해는 1079년이다.
김부식, 김부철 모두 소식, 소철이 살아 활동하던 시기에 그 이름을 따서 지어 붙인것이다. 김부식 집안이 당시 찬란하기 그지 없는 북송 문명에 대해 어느정도로 동기화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Proud 김부식 입장에서는 안 썼으면 안 썼지 쓰는 이상에는 반드시 열전을 입전하여 제대로 된 기전체 사서를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처음 쓰는 순간 알았을 것이다. 당시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도저히 기전체를 꾸릴수 없다는 것을.
왕력이야 어떻게 얽어서 본기와 표는 짓는다고 해도 도저히 열전은 입전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삼국사기의 열전을 보면 입전을 위해서 얼마나 있는 기록 없는 기록 박박 긁어 모았는지가 여실히 보인다.
그 결과가 그나마 풍부하게 개인 기록이 남아 있는 김유신의 열전 3권이다. 전체 10권 중 3권이 김유신 열전이니 전체의 30프로가 김유신 열전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왜 기전체를 포기하지 못했을까. 아마 김부식의 자존심 상 열전 없는 기전체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김부식 이전에 있었다는 구삼국사나 삼국시대의 역사 기록들은 모두 열전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 기록은 일본의 고사기, 일본서기 처럼 편년체를 방불한 본기에 열전 없는 형태였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만.
거기에 왜 굳이 무리해서 삼국사기에 열전을 지어 붙였을까.
김부식의 자존심이 결국 부실한 삼국사기의 열전을 만들어 낸 셈인데.
내가 아는 한 중국 이외의 국가에서 역사서에 열전을 지어 붙인 것은 김부식이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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