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위와 같은 기사가 나와 있다.
일본의 사립대생들이 모여 차별철폐를 외쳤다는 것이다.
무슨 차별 철폐일까?
바로 사립대 "전문부"에 대한 차별을 없애달라는 것이다.
"전문부"는 무엇이관대 차별을 없애달라고 했을까?
그리고 이 소식은 왜 조선의 신문에까지 실렸을까?
그 이유는 이 "전문부"가 조선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부는 일본의 구제 교육제도에서, 전문학교, 대학예과와 동급 학교였지만, 정확히는 이와도 위상이 같지 않았다.
원래는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대학령 발표 후 대학으로 바꿀 때 기존의 전문학교 학생을 새로 뽑는 대학생과 따로 교육하기 위해 두었던 것이 전문부인데
이것이 전문학교 학생들이 다 졸업한 후에는 성격이 바뀌어 전문학교와 같은 교육과정으로 유지하되 대학을 바로 들어갈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모아 두는 학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 사립대학 전문학교에는 조선에서 유학간 고보 졸업생들이 바글바글했다.
일제시대 기록을 보면 와세다대 교포 모임을 나가보면 와세다대 본과생은 거의 없고 전부 전문부 학생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 전문부를 거쳐 본과를 들어가려면 대개 여석이 발생하면 진학하게 되는데, 이렇게 전문부에서 본과를 들어가야 비로소 대학의 정식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만약 전문부 졸업으로 그치면 대학 졸업은 아니지만 저학력자가 판을 쳤던 조선에서는 대략 사립대 전문부 졸업이면 그 대학 졸업으로 퉁 쳐줬다.
따라서 사립대 전문부는 조선인에게 있어서도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이 기사는 1925년 당시 동아일보에 그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본다.
대학 전문부에 대해서는 아래 필자의 이전 글에 자세하다.
고보 졸업 후 일본 대학으로 직행한 사람들
언젠가도 쓴거 같지만, 일제시대, 고보졸업후 일본대학에 진학했다고 프로필이 나오는 경우는, 대개 그 대학의 예과 아니면 전문부에 해당한다. 이건 대학과정이 아니다. 대학 예과나 전문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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