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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잊혀진 미술 애호가, 오당悟堂 김영세金榮世(4)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조선총독부 경무국 관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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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2009년까지,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 행위와 광복 전후의 행적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다.

그 1권, 경찰 항목에 '김영세'가 등장한다. 한자이름, 1908년이란 생년에 출신 학교까지 딱 떨어지니 우리의 그 오당 선생이 아무래도 맞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그 김영세는 어떤 친일행각을 벌였던가?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근무한다. 경찰 촉탁囑託, 속屬이라는 하급직이었던 그의 일은 도서 검열.

어떤 책이든지간에 일제의 시책에 어긋나는 대목에 빨간펜과 가위를 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인, 화가 같은 예술인들과 두터운 친교를 맺었던 그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상당수 친일파는 예술을 사랑하고 교양으로 누리는 면모를 보였다. 이완용李完用(1858-1926)이 글씨에 능했던 것은 유명하거니와, 윤덕영尹德榮(1858-1940)이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를 후원하고 광주의 유명한 친일파 노주봉盧周鳳(1900-1945)이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패트런이었던 것처럼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은 으레 예술가의 뒷배가 되어주곤 했다.

하지만 속이라는 말단 관리 김영세를 그들을 볼 때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또 이상이 총독부 건축과에 취직했고 구보가 <매일신보>에 글을 쓰듯 생계의 수단으로 친일을 했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검열을 생계로 삼은 그가, 분명 자기 책상에 올라왔을 문우文友의 글을 과연 어떻게 다루었을까? 한 마디로 찝어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10년이나 근무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큰 저항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해방 후 그가 출판사를 차리고 <한국통사>를 발간한 일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표변豹變으로도, 양심의 발로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인데, 과연 모를 일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저 사전의 '삼평각'은 오타다. <한국통사> 실물을 확인해본 결과 삼호각三乎閣이 맞다. 옛말에 '어로불변魚魯不辨'이라던가)

하지만 적어도 오당과 가까웠던 예술가들은 그를 친일 행적 때문에 내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작품들로 보건대, 해방 이후에도 김영세와 그들의 교유는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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