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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잊혀진 미술 애호가, 오당悟堂 김영세金榮世(2) 구보 박태원 피로연 방명록

by taeshik.kim 202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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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궁금해지니 이리저리 수소문하게 되었다. 오당은 누구인가?

그러다 우연히 그 댁에서 나온 고미술품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수장가를 만나게 되어,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오당은 가회동의 큰 한옥에서 살았던 이로, 금융계에 종사했다고 한다. 근대의 예술가들과 두루 친교가 깊었던 듯 하고 그 스스로도 많은 미술품을 모았는데, 그의 사후 유품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단다.

그 수장가가 무신년(1968) 오당의 회갑을 기념해서 그려준다는 쌍관이 있는 작품 사진을 보여주어, 그의 생년이 1908년임을 알게 된 것이 마지막 수확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단지 그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아직도 시장에 가끔 나오며, 상당한 평판을 받는다는 정도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런데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잡혔다.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1934년 결혼을 한다.

결혼식 사흘 후 피로연을 열면서 스케치북을 하나 사다가 참석한 이들의 글을 받는데, 그 방명록이 아들에게 전해지다가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고, 2017년 <구보결혼>이라는 제목의 도록으로 발간된다.

구보의 결혼식 방명록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책으로 나온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길을 가다가 땀 좀 식히려고 들른 서울역사박물관 뮤지엄샵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휘휘 넘겨보다가 한 장에서 시선이 멎었다. "백년해로百年偕老"라고 큼지막하게 쓴 글씨였는데, 그 옆의 낙관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갑술년(1934) 중추(9월)에 悟堂이 朴泰遠 學兄에게 써준다는 게 아닌가. 깨달을 오에 집 당 - 김영세의 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 도록의 해설에 따르면 이 글씨는 근대 국악을 중흥시켰던 이왕직 아악사장 함화진咸和鎭(1884~1948)이 썼다(혹시나 싶어 찾아본, 구보의 아들 박일영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96쪽에서는 '고보 동창 오중 함화진'이라고 했다. 아마 당堂을 중重으로 읽었던지).

이게 어찌된 일인가...결론부터 말하자면 (방명록 해제를 쓴 서울대학교 권영민 교수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깨달을 오'를 '오동나무 오梧'로 잘못 읽으셨다.

함화진의 호도 오당은 오당梧堂인데 글자가 다른 것이다.

앞서 김영세의 생년이 1908년임을 알았는데, 구보와는 겨우 한 살 차이이다.
25살 차이가 나는 함화진보다는 훨씬 덜 어색하다.

그리고 김영세가 구보와 같은 경성제일고보 동창이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해졌다.

또 구보는 물론이거니와, 이 방명록에 등장하는 이상(1910~1937), 정인택(1909~1953), 안석주(1901~1950), 김규택(1906~1962) 같은 이들과도 교분이 있었지 않고서야
구보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아서 흥겹게 노닐고 술을 자시고(글씨를 보면 꽤나 취필이다)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그가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분이 깊었다는 증언도 어느 정도 입증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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