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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잠삼 시에 자주 등장하는 북정(北庭)과 윤대(輪臺)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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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 선생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잠삼의 시에 나오는 북정(北庭)은 어디인가?


먼저 "동한 때의 북정"에 대해 알아보자.


북정은 동한 때 흉노족이 남북으로 분열하면서, 북쪽을 통치하던 북선우가 거주하는 중심지이다. 이 중심지를 북선우정이라 하며 줄여서 북정이라 한다. 북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고 자주 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东汉初期汉光武帝与匈奴通好,不断派遣使者前往赐财物,而单于骄倨益横,汉匈关系仍没有改善。东汉建武五年(29年),匈奴扶植卢芳为汉帝,割据五原、朔方、云中、定襄、雁门等五郡,都九原(今内蒙古包头市西南)。后降汉,被封为代王。后复叛,留匈奴历十余年。

南北匈奴分立

  在东汉初年,匈奴就大量进入塞内。46年前后,匈奴国内发生严重的自然灾害,人畜饥疫,死亡大半。而统治阶级因争权夺利,发生分裂。48年,匈奴八部族人共立呼韩邪单于之孙日逐王比为单于,与蒲奴单于分庭抗礼,匈奴分裂为两部。后日逐王比率4万多人南下附汉称臣称为南匈奴,被汉朝安置在河套地区。而留居漠北的称为北匈奴。


기원후 48년 일축왕비 선우가 포노 선우와 대립하면서, 일축왕비 선우는 4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하여 감숙지방에 안치되었기에 남흉노라 하고, 북흉노는 사막 이북에 거주했다. 89년 두헌(竇憲)과 경기(耿秉)가 연연산(몽골 항아이산)에 오르고, 91년 동한의 군사가 금미산(金微山, 알타이산)을 공격했으므로 북정의 주요 위치는 결국 지금의 몽골 서부 지역에 해당하겠다.


"당대의 북정"은 북정도호부의 관할 지역을 가리킨다.


북정도호부는 702-791년 사이에 설치된 방진으로 원래 광대한 안서도호부의 일부였으나, 무측천 때 서돌궐을 막고 서역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분할하여 천산 이북(알타이산과 바이칼호 포함)을 관할하였다. 북정도후부의 치소는 지금의 신장 우루무치 동쪽에 있는 지무살(吉木薩爾). 천산 북록의 동단에 위치한다.


이에 따라 천산 이남은 안서도호부가 관할했다. 

안서도호부는 원래 당 건국 초기인 640년에 처음 설치된 후 808년까지 존속되었다. 북정도호부가 분할된 이후는 천산 이남(카자흐스탄 동남부, 타지흐스탄 동부, 아프칸스탄 포함)을 관할하였다. 640년 고창을 점령한 후 고창에 치소를 두었으나, 648년 쿠차국을 점령한 후에는 쿠차(龜兹, 지금의 庫車)로 옮겼다. 657년 소정방이 투루판 지역의 서돌궐을 평정하면서 치소를 다시 고창으로 돌아왔다가 다음해 다시 쿠차로 옮겼다. 702년 이후 천산 이남과 파미르고원 이동 지역을 주로 관할하였다.


안서도호부와는 별도로 안서절도사가 있었다. 

안서절도사는 안서 4진의 군사-정치 복합체를 관할하는 대빵.

안서 4진은 648년 안서도호부가 쿠차로 옮길 때 주위에 있는 쿠차(龜兹), 우전(于闐), 언기(焉耆), 소륵(疏勒) 등 네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안서도호가 지휘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718년 현종이 탕가혜(湯嘉惠)를 ‘사진절도경략사’(四鎭節度經略使)로 임명하면서 절도사가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사진절도경략사는 ‘적서절도사’(磧西节度使)라고도 했으며, 주로 쿠차에 주둔하면서 안서도호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안서절도사’라고도 칭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농우와 하서는 물론, 북정과 안서의 주둔군까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 안서와 북정은 중원과 연락이 끊겨 일시에 쇠락하였고, 안서 4진도 티베트의 손에 들어갔다.


역대 안서절도사


1 高仙芝 747.12.28 

2 封常清 752.12.25 

3 李珙 756.7.15 

4 衛伯玉 759.12. 

5 馬麟 763.11


그럼 잠삼은 북정에 갔는가?


잠삼은 749년과 754년 두 번에 걸쳐 안서(安西)에 종군하였다. 

첫 번째 서역 종군 : 749년(35) 겨울 - 751년(37) 6월. 대리평사 겸 감찰어사의 직책으로 안서절도사 고선지 막부의 판관으로 충임됨. 

두 번째 서역 종군 : 754년(40) 8월 - 757년(43) 6월. 안서절도사 봉상청 막부의 판관으로 나감.


두번 모두 안서절도사 아래에 있었다. 안서절도사 치소는 쿠차. 

쿠차는 투루판에서 중국의 서쪽 끝 카슈가르로 가다보면 천산 남록을 따라가게 되는데 중간에 나오는 곳. 이 길이 바로 천산남로로 남쪽으로 드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어 천산의 남록을 따라 길이 놓여 있고 성읍이 줄 지어 있는 형국이다.


잠삼의 시에서 자주 나오는 또 하나의 지명은 윤대(輪臺).


윤대는 정주(庭州)의 속현으로 치소는 지금의 신강 미천현(米泉縣). 이곳은 쿠차에서 동쪽으로 약 200키로 가면 나오는 지금의 윤대현(輪臺縣)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다.(약 400키로 더 감) 역사 지명은 주위 지역을 여러 차례 옮기진 경우가 많다. 윤대는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잠삼의 활동 범위는 두 번 모두 쿠차와 윤대 일대인 것. 그러므로 천산 북쪽과 인연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의 시에 북정이란 말이 자주 나올까?


다음 시를 보자.


<북정으로 부임하며 농산을 넘다가 집을 그리며>(赴北庭度隴思家)


西向輪臺萬里餘, 서쪽으로 윤대까지 만여 리나 되는데

也知鄕信日應疎. 고향 편지는 날이 갈수록 드물어지리

隴山鸚鵡能言語, 농산에 앵무새는 말을 할 수 있으니

爲報家人數寄書. 어서 알려주게, 집안사람에게 자주 편지하라고


제1구를 보면 잠삼은 북정과 윤대(輪臺)를 같은 지명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북정, 적서, 윤대 등을 유사한 지역 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가 강원도나 영동이나 관동이나 동해나 유사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처럼, 장안 출신인 잠삼의 입장에서는 이들 지명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지금 위에서 말하는 관할지역은 엄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고, 때로 북정도호부에서 윤대와 쿠차를 관할하기도 했다. 북정도호부의 지무살은 윤대와 멀지 않았던 것이다.


...잠삼이 다녔던 길을 생각하며

3시간 동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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