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179)
함길도 부원융 동년(同年) 강효문에게 부치다(寄咸吉道副元戎姜同年孝文)
조선 서거정(徐居正) / 김영문 選譯評
장백산 높이 솟아
푸른 하늘에 꽂혀 있고
산꼭대기 유월에도
눈 덮여 가파르네
어느 때 휘파람 불며
정상 올라 바라보나
사해는 티끌 없이
거울처럼 깨끗하리
長白山高揷大靑, 山頭六月雪崢嶸. 何時一嘯登高看, 四海無塵鏡面淸.
오늘(2018. 9. 20-인용자)은 한반도 두 정상이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다. 이러매 백두산을 읊은 우리 한시를 싣지 않을 수 없다. 나는 2005년까지 중국을 통해 몇 번 백두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가지 않았다. 굳이 중국 측 경로를 통해 갈 마음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웠던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다가 아이가 커가고 나도 나이를 먹게 되자 이러다가 정말 백두산에 한 번도 못 가보는 게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침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조성환 교수에게 백두산으로 가는 중국 여행사를 알아보라 하고(당시 우리나라 여행사보다 훨씬 쌌다) 드디어 2005년 8월 아들래미와 함께 백두산 여행에 나섰다. 성환이 부녀와 같이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지린(吉林)까지 가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二道白河)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기차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캄캄한 밤에 도착한 것으로 기억한다. 기차 안에 앉아 끝없는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이육사의 시와 백석의 시를 떠올렸고, 다시 마음속으로 민중가요 「광야에서」를 한없이 리플레이했던 듯하다.
다음날 백두산으로 들어가서 소위 지하삼림을 걷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인공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원시림 속의 백옥 같은 계곡물을 보는 순간 그 어떤 시원(始原)의 느낌이 전율처럼 등골을 훑으며 지나갔다. 나는 그보다 훨씬 앞서 태백산을 찾아가는 길, 봉화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어느 길고 긴 고개, 계곡과 능성이가 맞붙어버린 구부정한 비탈길에서도 어떤 시원(始原)의 느낌에 사로잡힌 바 있다. 그것은 초기 인류 삶의 어떤 터전인 듯, 우리 겨레 신화 속 마당인 듯, 또 내 어릴 적 소 풀어놓고 물고기 잡던 거랑가 들판인 듯 느껴져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에 어쩔 줄 몰랐다. 장백폭포의 거대한 물기둥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물보라도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마침내 찦차를 타고 천지에 올랐다. 찦차가 천지로 가는 높다란 산등성이에 오르자 저 뒤편으로 가없는 만주벌판의 산등성이들이 마치 어떤 고원 산맥의 파도처럼 장엄한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시원의 시원이었다. 나는 찦차 기사의 곡예운전에 몸을 맡긴 채, 굽이를 돌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원의 광야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도착한 천지는 눈앞 30cm 전방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다. 몰아치는 강풍에 몸도 가누기 어려웠다. 산꼭대기 바위 봉우리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안개의 심연이었다. 그 때 나는 다시 결심했다. 그래! 나중에 우리 땅을 거쳐서 다시 오자.
지금 우리는 백두산이란 이름을 쓰고, 중국은 장백산이란 이름을 쓰지만 조선시대에는 두 명칭을 모두 혼용했다. 따지고 보면 의미는 같다. 백두(白頭)는 여름에는 화산재와 겨울에는 흰눈 때문에 늘 꼭대기가 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장백(長白)도 마찬가지다. 장백을 중국 사람들은 창바이로 발음한다. 늘 희다, 또는 영원히 희다는 뜻이다. 장바이라 읽는다 해도 으뜸 봉우리가 희다는 뜻이 되므로 역시 백두(白頭)의 의미와 같다. 같은 뜻의 이름을 두 가지 명칭으로 부르는 셈이다. 그것을 우리 고유어로 표기하며 ‘한밝’이 된다. 즉 백두(白頭), 장백(長白), 태백(太白), 함백(咸白), 대박(大朴), 함박(咸朴), 백악(白岳), 소백(小白: 작은 백두산) 등이 모두 같은 계열의 이름이다. 심지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두류(頭流)도 백두산이 흘러와 맺힌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산도 흐른다. 그리고 작약산 또는 작약봉도 함박산을 완전히 뜻으로 풀이한 이름이란 설이 있다. 함박꽃이 바로 작약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밝’은 우리 땅 곳곳에 두루 존재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의 두 정상이 함께 백두산에 오르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디 ‘한밝’이란 이름 그대로 깨끗하고, 밝고, 평화로운 미래가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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