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예술의 세계에도 이 속담은 한치 어긋남 없이 들어맞는다.
부유한 이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그들의 작품을 즐겼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스스로 예술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아래 난초 그림을 그린 유당酉堂 김희순金熙舜(1886-1968)도 그런 경우이다.
그는 전주 부잣집 아들이었다. 가학으로 한학을 익혔고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1854-1903)에게 서화를 배운 그는 시서화삼절이라고까지 할 만큼 그림 솜씨가 좋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사군자를 출품해 한 번은 4등을 하고 7차례나 입선하는 기록을 세운다.
해방 후에도 김희순은 서화 연찬을 게을리하지 않아, 국전 입선, 추천작가로 활동했다.
또 김희순은 지역 예술 발전에도 공이 컸다.
1935년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1885-1966),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相(1891-1956)과 뜻을 모아 '한묵회翰墨會'를 결성하고 많은 이들에게 서화를 가르친다.
서울의 서화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그는 틈나는 대로 전주에 그들의 전시회를 유치했고, 그럼으로써 지역민에게 서울의 예술 경향을 큰 시차 없이 소개했다.
부자였던 그의 집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1902-1952),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심향深香 박승무朴勝武(1893-1980) 같은 대가들이 전주에 올 때면 무시로 그의 신세를 졌다.
술상을 보고 주인과 둘이, 또는 여럿이 잔을 나누다 취기가 얼큰히 오르면 누군가 종이와 붓을 청한다.
미리 갖춰진 문방사우로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때로 한 화면에 여러 사람이 그리고 주인 유당도 합세해 합작도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남은 합작도가 꽤 많아, 나도 몇 폭 구경한 적이 있다.
바탕 가득 취흥이 도도한 그런 그림을 보다 보면 그날 유당 댁 주연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오래 살았던 만큼 김희순의 작품은 적잖이 남아 있다.
요즘은 동양화 인기가 예전만 못한데다, 다른 작가에 비해 개성이 약해 보이고 지방 작가라 하여 사려는 사람은 드물다고 들었다.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 누구를 탓하리오.
여기 이 난초도 먹의 농담 조절은 능숙하지만 난잎의 구도나 괴석 생김새는 범범하다.
온유하고 진중한 맛은 있지만 튀어나온다고는 못하겠는데, 하기야 통통 튀는 성격이었다면 (전통적 의미의)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서여기인이란 말이 글씨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지 싶다.
화제는 추사의 그 유명한 <불이선란> 화제 그대로다.
김희순이 자기 스타일로 <불이선란>을 해석한 셈인가.
난초 그림 치지 않은 지 이십년 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그리려는 마음 솟구친다 偶然寫出性中天
문 걸어잠가 찾고 또 찾은 곳 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 此是維摩不二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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