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서 글씨 새겨진 대형 돌절구 발견…국내서 첫 사례
홍창진 / 2021-08-23 13:35:27
시기·제작자·시주자 명단 드러나기도 처음…"문화재 신청 검토"
요새는 홍보시스템이 많이 달라져 옛날에는 주로 언론기관을 통했지만, 요새는 개별 사람 하나하나가 1인 언론매체이면서 기자인 시대를 실감케 하니, sns가 그 직접 통로가 되거니와, 저 소식 역시 나는 어젯밤 엄원식 문경시청 문화관광과장(문화예술과장인지 정확한 직책은 모르겠지만 암튼 문화재 담당 학예직 출신 과장이다) 페이스북 계정 포스팅을 통해 접했으니, 저걸 기억해뒀다가 우리 공장 대구경북본부 문경 담당 기자한테 전달해서 추가 취재를 부탁했으니, 그렇게 해서 외부로 더 크게 공개된 사안이다.
애초 엄 과장 관련 글을 보면서 내가 의아한 점 중 하나가 현재도 농촌 같은 데서는 흔하디흔한 저런 돌절구로 저와 같이 만든 내력을 그 자체에다가 글자로 새겨 놓은 것으로 적어도 조선시대 이전 것으로는 내가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사례 아니었나 하는 그런 희귀성 때문이었으니
나아가 그 내용을 훑어보니 더 흥미로운 구절이 있었거니와, 첫째 이는 돈을 대서 만든 주체가 있고, 둘째 그 물주한테서 의뢰를 받고는 실제 그것을 제작한 석공 이름이 드러났으며, 셋째 그 용처가 아무리 봐도 사찰 시주용으로 판단한 까닭이다. 개인이 자기 집에서 쓸 요량으로 만든 것을 저리 표시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심증이 아무래도 컸다.
마침 듣자니 이것이 발견된 지점에 절이 있었다 하므로, 그렇다면 재가 불교신도가 무슨 요량으로 저 돌절구를 제작하고는 그것을 그 사찰에다가 시주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 하천 정비 과정에서 발견됐다는 이 돌절구 표면에 큼지막하니 새긴 18 글자를 보니
'康熙六年 丁未二月 金連進 作臼 石手 金各生'
이라, 이는 볼짝없이 강희 6년 정미년 2월에 김련진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으니, 그의 의뢰에 실제로 이 절구를 만든 돌쟁이는 김각생이라는 뜻이다. 김련진이 실제 이 물품 주인일 터다. 이 돌절구는 보다시피 제작 연대가 명확하고 나아가 그것을 실제로 만든 돌쟁이 이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또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 용처는 앞서 말한대로일 것이다.
비단 이 돌절구만이 아니라 같은 종류 석조물이 절간에서는 빈발한다. 그 용처가 곡물을 빻은 데 있으니, 그렇게 빻은 곡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공해 사람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으로 최종 모습을 변화했을 것이니, 첫째 절간에서 절구가 많이 발견되는 까닭은 절간이 지금도 대개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실제 각종 공장으로 기능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생산품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부와 종이라, 조선시대를 보면 지체 높은 사대부가에서는 개인 사찰을 거의 다 보유했으며, 그런 사찰에다가 필요할 때마다 음식을 그쪽에서 장만케 하는가 하면, 종이는 국가에서도 제작을 지정할당하기도 했다.
상공업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 절간은 당당한 경제생산주체였다. 이제 왜 그리 많은 절구가 조달된 통로 중 하나를 우리는 저 사례를 통해 추적케 되었으니, 저처럼 재가신도들이 제작해서 시주한 것이 제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 작은 절구 하나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절간을 둘러싼 경제행위 그 일단을 추정하니, 단순한 돌맹이 가공품을 넘어 저에는 경제행위 하나를 고스란히 온축한 실증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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