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이 4대조 제사 전담하는 풍습, 18세기 이후 정착"
박상현 / 2021-08-15 14:03:15
정긍식 서울대 교수가 쓴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문을 토대로 하는 보도인데, 한중연에서 관련 보도자료를 써서 뿌렸다. 그 전문이 아래다. 보통 이런 보도자료는 저자 본인이 쓰므로(몇몇 게으른 놈은 이런 것까지 왜 내가 하냐 하는 얼빠진 놈이 있기는 하다), 그의 생각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그 전문을 소개한다.
제사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신간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 발간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는 조선시대 유교적 제사승계의 법제 도입이 가부장제 사회 성립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과정을 담은 신간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을 펴냈다.
이 책의 저자인 정긍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전통시대 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법을 통해 당대인의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인 법사학자이다.
저자는 “제도와 관습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나 역사의 주체인 인간에게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만,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나면 활기를 잃고 인간을 억압하며, 다시 새로운 제도나 관습을 태동시킨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를 관통하는 핵심인 제사승계가 이제 역할을 다하고 마감된 것으로 본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계계승은 법적인 근거를 잃었지만 제사의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조상제사를 전통으로 믿는 세대와 형식화를 비난하는 세대 간의 갈등, 남계 위주의 제사를 둘러싼 남녀 갈등으로 인해 조상제사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례와 가부장제의 의미를 반추하여 제도적 정의와 관행의 현실 간 간극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리는 종가에서 종손이 4대를 봉사하며, 봉사자가 적장자, 적장손으로 이어지는 제사를 전통이며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적장자 중심의 제사가 우리 역사에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이는 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혁기에 주자학, 『주자가례』와 함께 이 땅에 들어와 16~17세기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이후에야 정착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강화되어 1958년 제정민법의 가 제도와 호주상속으로 정착되었다. 이상적인 제사의 승계는 5세기에 걸친 장구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193쪽)
이 책은 부계가족 중심의 제사승계 법제가 도입, 적용, 확산되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한 고려에는 제사를 특정인이 주재하게 하는 관행이 없었으나, 고려 말 이후 『주자가례』와 가묘제가 도입되면서 제사승계인을 적장자로 확정하려는 법적인 시도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에 이첨은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는 종법을 실시하여 가족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일부다처제가 묵인되어 처첩과 적서가 구분되지 않아 종자를 결정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종자법을 시행할 수 없었다.”
1390년 「사대부가제의」에 따라 장자봉사의 원칙이 규정되었으나, 장자승계의 원칙이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서 차자가 제사를 승계하는 형망제급, 손자가 제사를 승계하는 대습상속, 첩자가 봉사하게 하는 첩자봉사, 타인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봉사하게 하는 입후봉사 등 예외적인 상황에 적용할 규정들을 보완해 나가야 했다.
□ 바뀐 혼속과 제사를 통한 사회 질서의 재편 “제도는 일순간에 바뀔 수 있지만 삶과 관행은 전이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달라진다.”
오랜 시간을 두고 뿌리내린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제사승계의 기본 골격은 『경국대전』(1485)에 마련되었지만 16세기 중엽까지도 제사를 가계계승보다 사후봉양으로 여기는 관념이 강해서 여러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주재하는 윤회봉사나 딸과 사위, 외손 등에 의한 외손봉사, 노비에게 제사를 맡기는 묘직봉사의 관행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혼인 후에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솔서혼속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16세기 중엽 혼속이 솔서혼속에서 반친영례로 바뀌고 사위가 처가에 거주하는 기간이 단축됨에 따라 개인의 삶이 변하고 사회의 저변이 달라졌다. 혼인을 통한 가문의 결합으로 부계친족집단이 향촌사회에서 결속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중략) 이러한 현상은 1669년에 전라도 부안의 김명열이 동생들과 작성한 상속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김명열은, ‘아들딸들이 제사를 윤회봉사하는 것은 관례이지만 이는 예법에 맞지 않고, 또 사위와 외손이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지 않으니, 앞으로 우리 가문에서는 아들들이 제사를 지내며, 그 대신 딸들은 재산을 아들의 3분의 1만 상속하라.’라고 유언을 하였다. 즉 딸들은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 대신 재산상속에서 아들의 3분의 1만을 받게 하는 차별상속의 원칙을 세웠다. (중략) 반(半)친영례의 등장으로 사위와 처가의 정이 옅어지고 이에 따라 딸들과 외손이 제사에서 배제되면서 재산상속에서 차등상속을 받게 된 것이다. 나아가 조상과 후손에 대한 계보 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135~136쪽)
18세기 이후 제도적으로 정비된 제사승계 법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학의 발달로 4대봉사가 보편화되었고, 혼속의 변화로 제사에서 딸과 외손이 배제되었으며, 명분론의 강화로 첩자가 제사승계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반면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가계계승을 위한 입후가 확산되어,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친가와 양가 부모가 모두 사망한 후에 입후하는 사후입후, 양자가 양가와 생가를 동시에 모시는 생양가봉사 등이 허용되었고, 형제를 입후하는 차양자, 죽은 사람을 입후하는 백골양자 등의 변례까지 등장했다.
19세기 중엽 철종 대에는 대여섯 집마다 한 집씩 양자가 있을 정도로 양자를 통한 가계계승이 보편화되었다.
□ 가부장제 밖에서 제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조선 후기 향촌사회는 조상을 같이하는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성마을의 광범위한 존재와 문중 조직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공동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개로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제사승계가 중시되어 봉사자의 지위를 둘러싼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여성 특히 가문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종부의 삶에 질곡을 가져왔다.” (180쪽)
“제사승계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국적 가부장제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 이 제도와 관습은 순풍양속인 ‘전통’으로 인식되었고, 이 전통은 1958년에 제정되어 1960년부터 시행된 민법의 ‘가’와 ‘호주상속’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1990년 민법 개정으로 가부장제가 완화되어, 제사의 기능은 가계계승에서 사후봉양으로 수백 년 만에 되돌려졌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민법 개정으로 제사승계 내지 가계계승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2008년 대법원 판결로 제사에서 가계계승의 의미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다시 제사는 후손들이 돌아가신 부모와 조부모 등 조상을 함께 추모하는 가족의례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 흔적이 어떤 그림으로 남아 있든 제사는 그 본연의 의미로 인해 영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는 21세기의 삶에 적합한 제례의 전형을 조선 초기 제사승계에서 찾는다.
“그때는 부모에 대한 정을 고려하여 아들, 딸, 친손, 외손 구별 없이 돌아가며 모셨다. 이는 가족의 민주화이며 개성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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