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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정약용의 논어고금주

by 초야잠필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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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저작의 양이 많기 때문에 필자도 전부 다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한계는 인정하고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다만 그의 "논어고금주"에 대해서는 필자도 할 말은 있다. 

논어고금주는 예전에 논어 사서집주 윤독 때 필자는 이를 매장 윤독때마다 정약용의 해당 기술을 대조하며 읽었다. 

그래서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에 대해서는 나름 할 말이 있고 또 크게 실상과 다르지 않으리라 자부한다. 

나무위키에는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정약용은 유학자 중에서도 주자의 사서집주를 주체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여 보통 실학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성리학을 근본으로 부정한 인물은 아니다. 다산의 저서의 내용 자체가 성리학의 기본적인 전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참고로 다산이 가장 존경한 학자가 주자였다. 과거 역사학자들은 다산이 성리학을 깨부수고 자본주의적 사상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했었는데, 지금은 부정되었다.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청년사, 1955년). 현재 유학계에서는 정약용의 유학에 대한 관점을 주자에서 공자로의 회귀라고 보고 있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따르고 감히 주자를 비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논어고금주'란 논어 주석본의 통합본을 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오규 소라이와 같은 일본의 유학자들의 해석까지 참고한 것은 대단한 점.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유학이 발달하여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니 이제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란 생각을 한 건 빗나갔다.

이 기술은 일부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논어고금주는 애초에 쓴 목적 자체가 논어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 당시) 주를 선별해서 수록하고자 하는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논어의 주자집주와는 다른 부분이 당연히 있다.

주자가 인용한 부분 이외의 주가 많이 들어가 있고, 이에 대한 정약용 자신의 생각도 많이 적혀 있다. 그의 경학에 대한 생각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논어고금주는 "주자에서 공자로 회귀"했다거나 "주자의 사서집주를 비판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유심히 보면 정약용이 기존의 주석을 비판한 부분도 있는데 주자가 직접 쓴 주석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주자를 제외한 나머지 한당 유학자의 주석을 모두 돌려까기 한 책이 논어고금주이다.

반면 주자 자신의 주장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당 유학과 송명 이학의 차이를 알 것이다. 

성리학자는 한당유학은 맘대로 돌려까도 된다. 도통을 제대로 이어 받은 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명이학, 염락관민과 주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실제로 정약용은 송명이학, 특히 소위 말하는 성리학의 5대가 (염락관민=주렴계, 장재, 정호, 정이, 주자)에 대해서는 거의 비판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다산경학을 근대성의 측면에서 높이 칠 수 없는 이유이다. 

일본은 조선으로 부터 제대로 된 성리학을 도입한 후 17-18세기에 빠른 속도로 주자학이 분기, 발전을 거듭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근세유학은 에도시대 위와 같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이 중 가장 위의 "주자학파"가 바로 소위 말하는 에도시대의 "관학"이다. 

정약용의 경학은 아무리 잘 봐 줘도 일본유학의 "관학 주자학" 의 범주에서 벗어날수 없다. 

근대성을 부여하고 주자를 부정하고 비판했다고 하려면 가장 아래 "고학파" 정도 수준의 이단성이 있어야 한다. 

정약용은 마찬가지이고, 우리나라 유학자 중에는 이 정도 수준의 "이단성=근대성"까지 발전한 사람이 없다. 

정약용에 대해서 언급하는 바 "주자를 부정하고 공자로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에도시대의 "고학파"의 정신이 되겠는데, 정약용이 이 범주까지 이탈하여 이단성을 가지게 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유학은 "고학=공자와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유학"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정약용의 사상을 일본 에도시대에 옮겨 위치시키면 정확히 에도막부의 관학=정통 주자학의 범주에 속한다. 

정약용에게는 근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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