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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1차 고려거란전쟁] (8) 낙타 10마리, 양 천 마리를 끌고 귀환한 서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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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백마리 이백마리 정도 아닐까 하는데, 이보다 훨씬 많은 천마리 양을 끌고 왔으니 꼴 먹인다고 죽을 노릇이었을 것이다.

 
제1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서희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의 절대하는 후견인 성종을 먼저 보낸 서희 역시 목종穆宗 1년, 998년 음력 7월에 죽으니 향년 쉰일곱이었다.

그 시대로는 그런대로 장수한 편이지만, 후배 강감찬이 83세인가 살다 간 것을 보면 너무 일찍 갔다. 

그는 70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죽을 때 현직이었다. 태보太保이자 내사령內史令이었다.

아버지 역시 한가락한 재상 서필徐弼이라, 이런 금수저 집안 자식으로 18세에 갑과甲科 장원급제한 힘 중 하나가 이것이 백 아닐까 하는데 아무튼 그는 승승장구했고 전쟁영웅이었다. 

성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했을 때 영명사永明寺로 몰래 빠져나가 바람 좀 쐬자했다가 서희한테 개쫑크 당한 일도 있고 계사년993 전쟁 때는 앞서 봤듯이 국서國書를 들고선 적진으로 뛰어들어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했다.

소손녕이 고려어를 할 리 없고, 서희 역시 고려어를 몰랐기에 역관譯官이 통역했다. 고려사 그의 열전과 고려사절요 그의 졸기를 보면 이때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다.

소손녕은 대국의 신하이니 소국의 신하인 서희는 마땅히 뜰 아래서 절을 올려야 한다고 역관이 통역하자 화딱지가 나서 대들기를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것이 예이지만 양국 대신大臣이 만나는 일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치받았다. 

이런 옥신각신이 두어번 계속되고 요지부동하자 서희는 초강수를 둔다. 자신한테 배정된 숙소로 돌아와서는 아예 벌러덩 자빠진 것이다. 이거 보면 강단 하나는 끝내 주는 사람이 서희다. 

할 수 없이 소손녕이 불러 그래 네 생각대로 하자 해서 마침내 군영 문에서 서로 읍을 하고는 동서쪽에 나란히 동등하게 앉아 담판을 시작해서는 우리가 아는 그 밀약을 성사키에 이른다.

이거 보면 외교는 하나에서 열까지가 결국 가오다.

강화가 성립하자 우리 이제 한 잔 빨자 했지만 서희는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다가 이 꼰대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 노래방 기계 틀어놓고선 테스형 같이 부르기를 7일간이나 하다가 귀환한다.

돌아가는 서희한테 소손녕은 선물을 듬뿍 안긴다. 그 목록을 고려사에서는 낙타 10마리와 말 100필, 양 1,000마리, 각종 비단[錦綺羅紈] 총 500필이라 했다. 

이 정도 동물을 몰고 왔는데 문제는 저들이 쳐먹어댈 꼴을 어찌 댔을지가 몹시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저 회담이 겨울 음력 10월, 결국 사람이 먹을 콩 같은 곡물을 댔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고려에서는 골머리를 앓았을 법하다.

그래서인가? 제주에서는 손님 골탕 먹이려 귤 한 짝을 선물로 준다는데, 내가 이거 여러 번 받아봤는데, 들고 다니다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또한 저는 동물의 유입을 증언하는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도 대서특필해야 한다.

동물만 왔겠는가? 동물 전염병은? 구제역은? 등등 생각할 거리 천지다.

서희 이야기는 더 할 것이 남아 다음호로 남은 것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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