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서 실리외교? 이딴 말 함부로 하지 말라 했다. 모든 국제관계 외교관계는 실리를 추구한다. 고려가 실리외교를 추구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하나마나한 소리인 까닭이다.
고려가 송과 거란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한다? 보자 이 관계가 어찌 되는지.
정식 국교를 성립하고, 거란을 종주국으로 섬기기로 한 고려는 후속 조치에 착수한다.
이를 위해 위선 전쟁이 있은 이듬해인 994년 4월에는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가 표表를 들고서는 거란으로 가서 정삭正朔을 시행하였음을 아뢰고, 사로잡아 간 백성들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정삭이란 간단히 말해 우리 이제부터 거란의 시간을 쓰기로 했다는 말이다.
외교는 항상 주는 것이 있음 받아내야 한다. 이 경우에도 고려는 그 반대급부를 잊지 않았다. 포로로 잡아간 우리 백성을 돌려달라 했다.
그에 대한 반응이 없지만 안 돌려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돌려받았다. 물들어왔을 때 노는 접어야 하는 법이니, 고려 역시 노를 저었다.
하지만 고려는 속셈이 만만치는 않았다. 거란에 신속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는 했지만, 보복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그 두 달 뒤인 994년 6월 원욱元郁을 송에 보내서는 지난해 전쟁에 우리가 보복하려 하니 송에서도 그에 부응해서 남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거란 공격에 나서 달라! 요구한다.
하지만 송은 거란이 겁이 났다. 이제 겨우 북쪽 변경이 안정되었는데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고 후하게 대접만 하고 보낸다.
이에 야마가 돈 고려는 송과는 모든 국교관계를 단절하고 만다.
나는 고려가 진짜로 거란을 보복공격하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본다.
송에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국교 단절의 명분을 쌓았다고 본다. 고려도 송도 당시 선제 공격을 감행할 처지가 도저히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는 이렇게 냉정하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다. 고려가 양다리걸치기로 실리를 추구해? 웃기는 소리다.
그러는 한편 거란과의 밀약에 따라 고려는 속속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 영역을 차례로 차곡차곡 접수한다.
이 모든 전방 개척 사업은 서희 몫이었다. 서희에 의한 이른바 강동육주(실제는 육주도 아니고 육성이고, 성 숫자도 더 많았다) 개척이 진행된다.
나아가 압강도구당鴨江渡句當을 설치하는 이승건李承乾을 그곳 최고사령관 겸 행정관 사使로 삼았다가 얼마 뒤 하공진河拱辰으로 교체하니, 이 하공진이 훗날 충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길이길이 남기게 된다.
그 시점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994년 이해에는 거란에다가 기악妓樂을 바치기도 했지만 거란은 거절한다. 주는 대로 다 받아먹으면 가오가 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앞서 말한 적 있듯이 995년 7월에는 사내아이 10명을 골라 거란어를 익히도록 하는 조기유학을 단행한다.
또 그해 7월에는 아예 고려 국왕이 거란 사위가 되기로 결심한다. 좌승선左承宣 조지린趙之遴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거란 성종은 동경유수東京留守이자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 딸을 보내겠다고 한다.
소항덕, 바로 소손녕이다. 동경유수는 간단히 말해 거란 5개 수도 중에서도 동방 고려와 거란을 제어하기 위한 데다.
이 일은 요사에도 보이는데, 문제는 그 결과가 어찌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 추진만 하다가 중단되지 않았나 싶다.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다.
나아가 996년 3월에는 거란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장간張幹과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 소숙갈蕭熟葛을 고려로 보내 고려국왕 왕치를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책봉한다. 거란에서 책봉을 받은 넘버 원 고려국왕이 왕치 성종이다.
나아가 이 기회를 빌려 같은 달 고려는 그 사은사를 겸한 듯한데 한언경韓彥卿을 보내 폐백을 들인다. 이것이 혼인 청구에 따른 후속 조치인지는 모르겠다.
저 청혼은 아마도 성종이 훙하면서도 없던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998년 4월 거란은 성종이 전왕이 훙서했다 하여 이전에 받은 폐백을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려와 거란이 밀착해 가는 과정에서 宋은 제 살 길은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고려의 행태가 그들로서는 얼마나 아니꼽게 보였겠는가?
*** previous article ***
[1차 고려거란전쟁] (6) 압록강이 경계로 확정되고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차 고려거란전쟁] (9) 죽지 마라 기도하는 성종 (1) | 2024.03.02 |
---|---|
[제1차 고려거란전쟁] (8) 낙타 10마리, 양 천 마리를 끌고 귀환한 서희 (1) | 2024.03.02 |
망향휴게소 여명의 동상 (1) | 2024.03.02 |
[1차 고려거란전쟁] (6) 압록강이 경계로 확정되고 (1) | 2024.03.02 |
1933년 천연기념물 이전의 천연기념물 (1) | 2024.03.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