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801년(조선 순조 원년), 조선의 걸출한 학자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9-?)과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베이징에 다다른다.
이 연행에서 둘은 청대의 대학자 기윤紀昀(1724-1805)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한편, 많은 청나라 지식인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새로 만나 깊은 친교를 맺게 된다.
그들이 만난 사람 중에 진전陳鱣(1753-1817)이란 이가 있었다. 절강浙江 해녕海寧 사람으로 자는 중노仲魯라 하고, 호는 간장簡莊이라 했던 학자이자 장서가藏書家, 교감가校勘家였다.
책이라면 유득공이나 박제가도 어디 가서 빠질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들의 대화는 잘 통했고, 박제가가 진전에게 자기 문집에 얹을 서문을 청해 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들이 대화하던 중 서긍徐兢(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야기가 나왔다.
진전이 <고려도경>의 고려 판본이 있다던데-하고 박제가에게 물으니, 박제가 크게 팔을 휘두르며 필담지에 적기를,
"판각한 본이 매우 많지만, 아쉽게도 행낭에 넣어오지는 못하였소이다[刻本尙多 惜行笈中 未曾携帶耳]."
- <배경루장서제발기> 권2, '고려도경'
그런데 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은 현재 전해지는 판본이 남송 건도본乾道本(징강본澂江本이라고도 한다),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지부족재본知不足齋本 이렇게 셋이다.
건도본은 자금성 서고에 깊숙이 들어가있다가 민국시대에야 세상에 알려졌으며, 사고전서본은 명대 정휴중鄭休仲이란 이의 중간본으로 추정되는데 오탈자가 심각할 정도로 많다.
지부족재본은 청대의 포정박鮑廷博(1728-1824)이란 장서가가 교정을 거쳐 1793년 간행한 판본인데 역시 오탈자가 적지 않다.
아마 이런 사정 때문에 진전이 고려본의 소재를 물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박제가는 "刻本尙多"라 한 것이다.
만약 18세기까지 이렇듯 <고려도경>의 고려 판본이 많았다면,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지!
박제가와 함께 갔던 유득공의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을 보면 이런 기사가 있다.
요포蕘圃 황비열黃丕烈(1763-1825)이란 장서가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이런저런 문답을 하다가 <고려도경> 얘기를 꺼낸다.
요포가 또 말하기를,
“전일에 그곳 주인으로부터, 선생이 《고려도경》을 찾더라는 말을 들었는데, 내 집에 영인한 송본宋本이 있습니다. 지부족재知不足齋의 각본刻本보다 오히려 낫지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가져오지 못했으니, 뒷날 서로 만날 날이 있게 되면 가져오겠습니다. 한번 구경하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황하黃河가 맑기를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한번 보게 된다면 매우 유쾌하겠습니다.”
하였다.
- <연대재유록>
유득공은 왜 베이징에서 <고려도경>을 찾았을까?
유리창 서점가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사오지 못하고 서문만 베껴 온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사례처럼 중국 판본을 조선에 들여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앙엽기盎葉記'에서 <고려도경>을 퍽 상세하게 언급하면서도 고려 판본 이야기는 안 하는 걸 보면, 애초 18세기 당대에 이미 <고려도경>의 고려 판본은 거의 없었고 읽어본 이도 매우 드물다고 봐야 맞지 않을까.
그러니 유득공이 베이징 서점가를 돌아다니며 <고려도경>을 구하러 다니고, 박제가는 그 소재를 묻는 이국의 친구(?) 앞에서 너스레를 떨며 위기를 넘기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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