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강 때 하도 수중보가 유명해져서
보[洑 혹은 湺]라는 것이 사대강 이전에는 없었고
사대강 때 비로소 생겨나 수질 오염을 낳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지식이다.
전술한 글에서와 같이 조선후기 들어 17세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개간 열풍이 불고 수리시설이 폭증하여 이전까지 보편화하지 않은 이앙법이 비로소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이때 한반도 전역에 폭증한 것이 바로 보다.
물론 사대강 때처럼 콘크리트 수중보가 아니라
돌과 나무로 엮은 허술한 보라 대개 다음번 큰 홍수가 나면 다 떠내려가고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으로 안다.
중요한 것은 이 보가 전국적으로 폭증하여
논 물을 이 보로 대며 개간과 이앙에 혁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후기 논문만 읽어봐도 이미 그 시대에 우리나라는 전국 곳곳 보가 없는 곳이 없었는데
사대강 사업으로 시끄럽던 당시 수중보가 사대강의 창안품 같이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고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보는 사대강으로 처음 설치된 것이 아니라
17세기 넘어서면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이미 없는 곳이 없었던 가장 보편화한 수리시설이었다.
보가 있어야 농사를 짓고 논물도 대고 이앙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 없는 논농사, 특히 모내기는 생각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봄만 되면 가뭄에 시달리는 한국 기후에서 보의 보편화는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 농부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이렇게 봄에 논물 대며 요긴하게 쓰던 보는 여름철 장마 때 큰물로 대개 다 떠내려가고 이듬해 농사를 위해
다시 또 만들어야 했던 것으로
사대강 당시의 수중보는 이렇게 조선시대 내내 떠내려가고 새로 만들고를 반복하던 보를 콘크리트로 수중에 영구적으로 설치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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