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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진공대사(眞空大師)

by taeshik.kim 2018.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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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 (결락) 상주국(上柱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撰)하고, (결락) 병부대감(兵部大監) 상주국(上柱國) 사단금어대(賜丹金魚袋) 신(臣) 이환추(李桓樞)는 교서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결락) 그러나 니원(泥洹)이 너무 빠르고, 용화(龍華)는 널리 인천(人天)을 주도하겠지만, 그 출세(出世)가 너무 늦은 것이 못내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천축(天竺)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고, 설산(雪山)은 더욱 멀며 또한 험로(險路)이다. 그러므로 불교(佛敎)가 인도에서 발상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가담(伽譚)이 동토(東土)로 전래되지 못하였다. 옛날 성왕(聖王)이 있어 중국이 불교전래에 대한 참기(讖記)를 적어 남교사(南郊祀) 곁에 묻어 두었는데,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임금의 몽징(夢徵)과 부합되었다. 그리하여 상사(上士)가 자취를 이어 (결락) 진단(震旦)으로 와서 불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기존의 세력인 도교(道敎)로부터 반발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평(永平) 10년(67) 도교의 지도자와 불교(佛敎)의 고승간에 법력(法力)의 대결이 있게 되었는데, 마침내 도교(道敎)의 패배로 돌아가자, 도교인(道敎人)들은 변수(邊陲)로 도망가거나 또는 자살하였다.

이로써 점차 현정(玄情)을 밝혀 불교에로 눈을 돌려 법안(法眼)을 엿보게 되었다. 이 때 응진보살(應眞菩薩)인 원각대사가 있었으니, 그는 불교의 전파를 위해 중국에 와서 양무제(梁武帝)와 대담하였으나 의기(意氣)가 맞지 아니하여 다시 위(魏)나라로 가서 효무제 임금을 만나 대화하였다. 역시 투합(投合)되지 못하여 결국 숭산(崇山)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간 면벽하다가 천재(天才)인 신광(神光) 혜가(惠可)를 만나 비로소 의기(意氣)가 상투(相投)하였으니,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의 단심(丹心)으로 말미암아 『능가경(楞伽經)』과 아울러 정법안장(正法眼藏)인 전심지요(傳心之要)를 전해 주게 되었다. (결락) 그 후로 선종이 크게 진작되고 널리 전파되었다. 그로부터 6대(代)로 전승하면서 각기 종(宗)을 개천(開闡)하여 거듭 정윤(正胤)의 법통을 빛나게 하였다. 따라서 지(枝)와 간(幹)이 서로 의지하여 울창하며 영(英)과 화(華)가 공발(共發)하여 더욱 향기로웠다.

남악(南岳)에 이르러 법(法)을 강서(江西)에게 전하였고, 그의 방출(傍出)인 법손도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결락)

대사의 휘(諱)는 ▨운(▨運)이요, 속성은 김씨이니, 계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성한(聖韓)에서 강등하여 나물(那勿)에서 일어났고, 근본에서 지말(枝末)까지 약 백세(百世)동안 가유(嘉猷)를 끼쳤다. 대부(大父)는 산진(珊珎)이니, 관직이 본국(本國)의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으며, 아버지는 확종(確宗)으로 여러 번 벼슬하여 본국(本國)의 사병원외(司兵員外)에 이르러 함께 조상의 덕을 선양하면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였다. 어머니는 설씨(薛氏)니, 일찍 (결락) 을 꾸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발원하여 그윽이 주미(麈尾)를 엿보고 곧 특별한 상서를 얻어서, 드디어 대중(大中) 9년 4월 18일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자(聖姿)를 지녔고, 어렸을 적에도 전혀 장난을 하지 아니하였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도하면서 누구를 의지하여 살 것인가 하고 슬피 피눈물을 흘렸으며, 능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항상 염장(塩醬)을 먹지 아니하였다.

지학지시(志學之時)에 이르러 학당으로 책을 끼고 가서 책을 청익(請益)함에 있어서는 (결락) 천재(天才)로써 다섯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되,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감라입사지년(甘羅入仕之年)에 이미 그 명성이 고향에 널리 퍼졌고, 왕자 진(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던 나이에는 서울까지 명성을 떨쳤으니, 어찌 불법에 대한 깊은 숙연(宿緣)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세속을 싫어하여 성선(聖善)에게 입산 출가할 것을 허락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요구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간절한 정성을 끝내 막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더욱 그 뜻을 굳혔으며, 어머니는 어릴 때 학업을 중단하는 것은 마치 단기(斷機)와 같다고 설득하였으나 처음 마음먹었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마침내 출진부급(出塵負笈)의 길을 떠나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구도의 길을 떠났다.

그 후로 가야산(迦耶山)으로 가서 많은 스님들을 친견한 후, 선융화상(善融和尙)에게 예배를 드리고 은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득도하게 되었다. 그 후 함통(咸通) 15년에 이르러 가야산 수도원(修道院)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어 (결락) 산에서 수하(守夏)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니 어찌 만유(滿油)의 바리때를 넘치게 했으리요. 뿐만 아니라 부해지낭(浮海之囊)도 망가뜨리지 않았으니 그윽이 사의(四依)를 앙모하고 경률론 삼장(三藏)의 연구를 발원하였다. 학업을 청할 때에는 침식을 전폐하였고, 책을 펴 놓고 토구(討究)함에는 그 깊고 얕은 천심(淺深)의 교리를 철저히 파헤쳤다. 어느 날 선융화상이 이르되 “노승(老僧)이 대중을 떠나 고요히 지낼 곳을 찾으려 한다면서 교소유폐(敎所由廢), 즉 교화하는 일을 그만두고 은둔하겠다는 이유를 말하면서, 수행력이 부족하여 더 이상 지도할 힘도 용기도 없다는 오무여용(吾無餘勇)을 주장하면서 너희들을 사방(四方)으로 팔아 넘겨야겠다”하며 “가가여조(可賈汝曹)하리라”하므로 대중들은 갑자기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섭섭함에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득이 암혈(岩穴)을 하직하고 행각의 길을 떠났다. 우연히 어떤 선려(禪廬)의 유지에 이르러 잠깐 비개(飛盖)를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전에 어떤 선납(禪衲)이 안거(安居)하던 곳이었다. 안개가 걷힌 후 사방(四方)을 살펴보니 완연(宛然)히 옛날 자신이 살던 곳과 같았기에 자세한 행지(行止)를 듣고 깊이 종용(從容)한 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얼마 동안 주석(住錫)하다가 다시 행선지를 운금(雲岑)으로 정하였으니, 곧 설악산(雪岳山)이다. “동해 곁에 있는데 선조인 (결락) 대사가 적수(赤水)에서 탐주(探珠)하다가 서당(西堂)의 법인을 전해 받고 청구(靑丘)인 신라로 돌아와서 해동(海東)에 선을 전래하고 초조(初祖)가 되었으니, 그는 후생(後生)을 위하는 뜻으로 선철(先哲)의 당부를 깊이 간직하였다.”

그 후 엄명(嚴命)을 받들고 진전사(陳田寺)에 도착하니, 기꺼운 바는 직접 도의국사의 유허(遺墟)를 답사하며 그 영탑에 예배하고 스님의 진영(眞影)을 추모하여 영원히 제자의 의식을 편 것이니, 마치 니보(尼父)가 (결락) 을 스승삼은 것과 같이 인(仁)과 덕(德)을 흠모하며, 맹가(孟軻)가 안자(顔子)를 희기(希冀)한 것처럼 의(義)를 소중히 여기고 마음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진리가 있으면 능히 알아서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한 동안 도수(道樹)에 서지(栖遲)하고 선림(禪林)에 기거하였다. 도의(道義)보다 먼저 향승(鄕僧)인 항수선사(恒秀禪師)가 일찍이 해서(海西)에 도달하여 강표(江表) 지방으로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묻기를 “서당의 법이 만약 동이(東夷)로 흘러간다면 어떤 아름다운 징조가 있는지 그 묘참(妙讖)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지장(智藏)이 대답하되 “불교의 교의가 쑥대밭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찾아내고(道) 불은 봉애(蓬艾)의 꽃봉오리에서 왕성하게 불타니(義) 청구(靑丘)의 도의선사가 그 기운을 이어 받아 선법(禪法)을 전파하리니, 그로부터 만총(萬叢)이 스스로 화창(和暢)하리라”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도의국사가 동국에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전파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 성문(聖文)을 추인(追認)하였으니, 이는 도의스님의 호를 나타낸 것이다. 그로부터 백년 후에 이 사구(四句)가 널리 전하였으니, 마치 우객(羽客)이 서로 만남으로써 단구(丹丘)의 자(字)를 알게 된 것과 같았다. (결락) 일도(一到)하면 홀연히 백일지명(白日之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락) 병(甁)을 휴대하고 삼춘(三春)에 육환장을 짚고 은거(隱居)할 곳을 중현(重玄)의 언덕에서 찾았고 심오(深奧)함을 중묘지중(衆妙之中)에서 탐색하였다. 남쪽으로 옥경(玉京)에 이르러 의문지망(倚門之望)을 위로하고, 서쪽으로 김해(金海)를 찾아가서 초은(招隱)의 거처를 중수하여 회상(會上)을 설치하니 찾아드는 학인이 구름과 같이 운집(雲集)하였고 받아들인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그는 (결락) 유가(瑜伽)의 의룡(義龍)과 (결락) 두 영납(英衲)인 대덕(大德)으로부터 지난날의 도풍(道風)을 듣고,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고는, 간절히 서심(栖心)할 마음을 쌓아서 함께 북면(北面)의 정성을 펴게 되었다. 이 때 높이 하늘 끝을 우러러보고 멀리는 지구의 밖을 보았다. 王의 기운이 바로 술해(戌亥)에서 충천하고, 패도(覇圖)가 널리 동남(東南)에 떨쳤으니, 여광(呂光) (결락) 을 보지 못하였으나, 征 (결락) 초헌을 관사(官舍)에 머무르고 왕능(王能)인 장좌승(長佐承)으로 하여금 사사공양(四事供養)을 올리되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였다. 드디어 잠깐 위급한 상황을 뒤로 제쳐놓고 대중 스님을 시봉함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국부(國父)로 여기는 최선필(崔善弼) 대장(大將)은 금탕(金湯)과 같은 법성(法城)이요, 돌기둥과 같이 견고한 자실(慈室)이었는데 경치가 좋은 영경(靈境)으로 초빙하여 주석하게 하였다. 스님은 여기서 몇 해를 지낸 후 무더운 (결락) 달빛은 유영(柳營)을 밝게 비추었으니, 그 향기가 전단향(栴檀香) 나무를 뒤집었고, 구름이 난폐(蘭陛)에 일어나 그 향기로움이 첨복향의 향기를 가득하게 하였다. (결락) 대사는 멀리 남방(南方)으로부터 북쪽으로 와서 소백산사(小伯山寺)를 중수하고 스님을 청하여 그 절에 안거(安居)하게 하였다. 급히 자니(紫泥)를 받들어 그윽이 왕의 소박한 간청에 응하여 욱금(郁錦)으로 옮겨 갔으니 비로소 금회(襟懷)에 부합되었다. 연비(蓮扉)를 열자마자 대중이 도마(稻麻)처럼 열을 이었고, 모사(茅舍)를 널리 확장하니 (결락) 오랑캐의 세력들이 바야흐로 성가(聖駕)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장차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정성을 펴고자 하여 잠시 난여(鑾輿)를 멈추고 공손히 이굴(理窟)로 나아갔으니, 마치 황제(黃帝)가 공동산(崆峒山)에 가서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물은 것과 같으며 또한 한만지유(汗漫之遊)와도 같았다. 정성을 다하여 설미(雪眉)를 앙모하면서 법문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 때 진공대사가 이르되 “제황(齊皇)이 북방으로 행차(幸次)하여 (결락)” 문득 기꺼워하였고, 그는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니, 어찌 서로 비교할 수 있으리요.

청태(淸泰) 4년 봄 2월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르되 “경화(京華)에 도착하니 조계종지(曹溪宗旨)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연하(輦下)에 와 있으니 실로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에서 3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한 마음은 아니다.” 그러나 노승(老僧)과 대왕(大王)은 (결락) 이러한 때 이적(二敵)은 평정되고, 삼한(三韓)은 태평성세가 되었으니 먼저 제흉(除)의 신책(神策)을 경하하고는 다시 성스러운 위의(威儀)를 축하하였다. 임금께서 재차 스님을 찾아뵙고 또 다시 용안(龍顔)의 감회를 더욱 간절히 하였으며, 거듭 스님이 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왕은 자주 찾아뵙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였으나 대사가 (결락) 덕산(德山) 중으로 옮기고서는 서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고 하루 속히 운천(雲泉)으로 돌아가서 암곡(岩谷)에서 지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복걸(伏乞)하였다. 임금이 스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여러 번 선비(禪扉)로 나아가서 문안을 하였다. 대사가 전도(前途)에 전핍(轉逼) 후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기를 원하므로 그 후 고산(故山)으로 돌아가서 신사(新舍)를 수축하였다. 길이 급인(汲引)하여 탁마 상성하기를 말하고 모두 전제(筌蹄)를 버리고 선(禪)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학인(學人)이 묻되 “가섭(迦葉)이란 어떤 분입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가섭이니라.” 또 “석가는 어떤 분입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석가일 뿐 이라”고 하였다. 不待 (결락) 이미 담란(曇鑾)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미리 수역(壽域)에 왕생할 것을 기약하여 혜원(惠遠)의 뜻을 추종하였다. 그러므로 날마다 현리(玄理)를 이야기하여 법을 전수할 제자를 구하다가 홀연히 미병(微病)이 생기고 날로 점점 심해져서 천복(天福) 2년 9월 1일 (결락)에서 입적하였다. 햇빛은 참혹하고, 구름은 우울하였으며 강물은 마르고, 땅은 진동하며 산은 무너지는 듯 하였다. 사방(四方) 멀리까지 모든 사람은 슬픔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인봉(隣封)까지 모든 사람들이 식음을 전폐하였다. 임금께서도 갑자기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으시고 깊이 슬픔에 잠겼다. 특사를 보내 조문하는 한편, 장례에 필요한 자량(資粮)도 함께 보냈으니, 왕의 전인(專人)과 문상객들의 왕래가 기로(岐路)에 상접(相接)하였다. (결락) 오직 300여보(步)의 거리였다. 풍황(風篁) 소리와 서리 맞은 계수나무와 같은 곧은 자태는 청정 고매한 스님의 정덕(貞德)을 상징하였고, 그 자태는 허공에 가득하며 앙모함은 고산(高山)과 같았으며, 헤아리는 지혜는 바다보다 깊었다. 그러므로 사방(四方)으로 다니면서 덕화를 베풀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면서 불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머물렀으니 (결락) 모든 군생(群生)들의 자부(慈父)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도사(導師)가 되었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현양선사(玄讓禪師)와 행희선사(行熙禪師) 등 4백여 인이 모두 계주(髻珠)를 얻고 함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서 마침내 법왕(法王)의 제자가 되었으니 길이 (결락) 단심(丹心)은 금(金)과 같고, 지극한 정성은 옥(玉)과 같았다.

바라는 바는 서로 보존하여 방명(芳名)을 후세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고, 함께 의논하여 경사스러움을 미래에 무궁토록 보여 주고자 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내리도록 천감(天鑒)에 주청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왕은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라 하고 탑명(塔名)을 보법지탑(普法之塔)이라 추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냥 단조(丹詔)를 반포한 것이라고만 하겠는가.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빛나고 고상한 문장(文章)을 엮어 법답게 스님의 빛나는 행적을 천양토록 하라 하셨으나,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일엽(一葉)일 뿐만 아니라 학해(學海)에서도 한낱 미생(微生)에 불과하다. (결락)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조잡하게 선문(鮮文)을 짓고, 명(銘)하여 가로되

(결락)

(결락)

(결락)

(결락) 허공과 같으며

천인(天人)이 함께 덕화를 사모하고,

도속(道俗)이 모두 덕풍(德風)을 흠모하며

대천(大千)의 세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와 함께 계합(契合)하였네.

이로부터 한 잎의 꽃이 피었으니

그가 바로 조계종의 종조이로다.

탁월하고 고매한 도의국사(道義國師)님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학자(學者)들은 모두 피로를 잊고

의사의 문 앞에는 환자가 많네.

도( 道)에 뜻을 두어 대원(大願)을 세웠으나

이젠 연좌(宴坐)할 기력도 없구나.

갑자기 생(生)을 걷어 열반에 드니

재보(宰輔)들이 부음(訃音)을 보고하였다.

(결락)

(결락)

(결락)

세차(歲次) 기해(己亥)

8월 15일 세우고,

최환규(崔煥規)는 글자를 새기다.


【음기(陰記)】

소백산(小伯山) 진공대사가 열반에 임하여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계.

모든 대중들에게 당부하노니 나는 지금 이미 해가 서산(西山)에 드리운 것과 같이 죽음 직전에 있으므로 살아 있을 날이 수일지내(數日之內)에 있다. 이른 서리가 봄 꽃을 침위(侵萎)시키는 것을 아쉬워하지도 않거늘 어찌 가을의 황엽(黃葉)이 청계(淸溪)에 떨어지는 것을 근심하랴. 이는 본분납승(本分衲僧)의 사체(事體)이다. 예도(禮徒)의 종(宗)은 윗사람 공경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아랫사람 사랑하길 적자(赤子)와 같이 여길 것이니라. 상하(上下)가 화합(和合)하여 항상 삼가고 예의와 질서가 없이 낭자(浪藉)하게 하지 말라. 내가 생존시에도 항상 거칠어 녹폭(暴)한 사실이 있었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을까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소소한 일로 권속간의 인정에 얽혀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고, 각기 스스로 잘 호지(護持)하여 취의(毳衣)와 철발(綴鉢)로 가는 곳마다 수행에만 전념하라. 종상이래(從上已來)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풍(門風)에 누(累)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남북지중(南北之中)에서 이 소백산(小白山)에 주석(住錫)한 7~8년 동안 십방(十方)의 납자(衲子)가 본광(本光)을 찾고 본색(本色)을 탐구하면서 어언 여러 해를 지나게 되었다. 분(分)을 따라 정진하여 때를 쫓고 세상을 수순하되 특별한 궤칙(軌則)은 두지 말고, 평범한 진리를 따르도록 하라. 또 방탕하거나 안일하지 말 것이며, 동량(棟梁)이 되려는 원력 또한 잊지 마라.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를 피하듯 처음부터 행하지 말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간에 항상 조심하여 여법(如法)하게 수행토록 하라. 내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려 하니, 세상(世相)의 뜻으로써 속되게 애통해 하거나 허둥지둥하지 마라. 금생(今生)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내(來來) 세세(世世)에는 다 같이 부처님 법석(法席)에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故眞空」

大師碑」(題額)」


                     上柱國臣」

      崔彦撝奉 敎撰」

           ▨▨▨▨兵部大監上柱國賜丹金魚袋臣李桓樞奉」

      敎書幷 篆額」

▨▨▨▨▨▨▨▨▨泥洹之早龍華曠主人天傷補處之遲於是天竺阻脩雪山遼夐久經綿載猶隔伽譚則知昔日聖王幾覩埋郊之記當時明帝方諧應夢徵所以 上士聯」

▨▨▨▨▨▨▨來臻於震旦道流隱遁於邊陲以此稍淨玄情希窺法眼爰有應眞菩薩圓覺大師東入梁朝北遊魏境此際始逢惠可因呈捐臂之誠再付楞伽便授傳心之要」

▨▨▨▨▨▨其道彌尊然則六代開宗重光正胤枝幹之相持欝茂英華之共發芳菲至於南岳繼明江西旁午當仁不讓可得而言」

▨▨▨▨▨運俗姓金氏鷄林人也其先降自聖韓興於勿本枝百世貽厥嘉猷大父珊珎累官至本國執事侍郞父確宗歷仕至本國司兵員外俱揚祖德克紹家聲母薜氏甞」

▨▨▨▨期孕秀窺塵尾仍得殊祥大中九年四月十八日誕生生有聖恣弱無兒戱齒登曰悼天蔭云亡何怙之悲每增泣血克諧追念常切絶醬至於志學之時橫經請益五」

▨▨▨一字無遺甘羅入仕之年譽高閭里子晋昇仙之歲聲冠京華豈謂意感辭家心深猒俗諮於聖善冀託禪門母氏懇阻其誠憐而不許倍增勸勵勤話斷機然而不改初心」

▨▨素慊出塵負笈陟巘携藜所以問道迦耶尋師設實得禮善融和尙請以爲師於是仰告所懷虔祈削染和尙便從懇請尋以披緇咸通十五年受具足戒於當山修道院旣而」

▨▨▨山維勤守夏寧漏滿油之鉢不虧浮海之囊然則仰四依願窮三藏請業則都忘昏曉披文則頓悟淺深和尙謂曰老僧離群索居敎所由廢吾無餘勇可賈汝曹▨▨忽聽師言不勝惆悵便辭巖穴尋涉路岐以此偶屆禪廬蹔停飛盖」

便是一納禪師之居披霧之間宛如舊識及聞行止深賜從容此時北指雲岑呼爲雪岳中有海東先祖」

▨▨大師赤水探珠佩西堂之印靑丘返璧爲東土之師渠爲後生志蘊先哲所以奉遵嚴命得到陳田所喜親踏遺墟禮其靈塔追感眞師之影永申弟子之儀可謂尼父則師彼」

▨▨欽仁嚮德孟軻則希於顔子重義歸心者乎是則有理能知無師自悟於是栖遲道樹偃仰禪林先是鄕僧恒秀禪師早達海西廣遊江表問西堂大師曰西堂之法儻注東夷」

▨▨休徵可聞妙䜟大師對曰義披蓬艾火盛於花丘讖其運萬叢自龢然則追認聖文著其師号百年之後四句遠傳猶如羽客相逢知有丹丘之字▨▨一到忽窺白日之銘其」

▨▨▨▨甁三春飛錫索隱於重玄之畔探深於衆妙之中所以南詣玉京只慰倚門之望西尋金海貪修招隱之居此際來者如雲納之似海其於善▨▨▨▨▨▨▨瑜伽義龍」

▨▨▨▨二英大德曩日聞風玄關覩奧便蘊栖心之懇俱申北面之誠於是遙仰天涯遠瞻地表王氣直衝於戌亥覇圖普振於東南所以未見呂光▨▨▨▨▨▨▨▨▨▨征」

▨▨▨▨王停軒官舍王能長佐丞四事供給丹誠敬恭遂乃蹔傍危途臻於納蔭國父崔善弼大將軍金湯法城柱石慈室請栖靈境頻改歲時暑▨▨▨▨▨▨▨▨▨▨▨▨」

▨▨▨▨▨▨月暎柳營馥馥翻栴檀之樹雲生蘭陛芬芬滿薝蔔之香者矣   ▨▨▨▨▨▨師遠自南方來儀北境重葺小伯山寺遙請居之  大師忽奉紫泥潛膺素懇便遷郁錦方副襟懷纔啓蓮扉稻麻有列廣開茅舍▨▨▨▨▨▨▨▨▨▨▨▨」

▨▨▨▨▨▨戎之勢方迴聖駕將披禮像之誠乍駐鑾輿恭趍理窟猶似峒崆之問亦如汗漫之遊虔仰雪眉冀聞風旨  大師謂曰齊皇北幸▨▨▨▨▨▨▨▨▨▨▨▨」

▨▨▨▨▨▨便悅彼多慙色何以比倫淸泰四年春二月謂衆曰言到 京華追愧曹溪之旨若遊輦下實非廬阜之心然老僧  大王▨▨▨▨▨▨▨▨▨▨▨▨」

▨▨▨▨▨▨此時二敵氷鎖三韓霧廓先慶除兇之策更申賀聖之儀  上再謁  慈顔幾切龍顔之感重窺獨步偏愁虎步之遲  大師▨▨▨▨▨▨▨▨▨▨▨▨」

▨▨▨▨▨▨德山中徙倚每迴而思近死期伏乞速到雲泉先銓巖谷  上乃偏傷師語實惻眷情累詣禪扉重窺玄境  大師前途轉逼後▨▨▨▨▨▨▨▨▨▨▨▨」

▨▨▨▨▨▨▨學人閱情以後得屆故山仍修新舍永言汲引皆擲筌蹄學人問如何是迦葉師對云迦葉如何是釋迦師酬曰釋迦則知不待▨▨▨▨▨▨▨▨▨▨▨▨▨」

▨▨▨▨▨▨▨旣鄙曇鸞之志預期壽域追遵惠遠之懷所以每日譚玄求人付法忽歎尋因微疾以至彌留以天福二年秋九月一日順化于▨▨▨▨▨▨▨▨▨▨▨▨▨」

▨▨▨▨▨▨▨▨光慘黷雲愁水竭地動山崩此際四遠含悲隣封輟食上欻聆遷化深慟宸衷專遣王人特令吊際贈資所送岐路相▨▨▨▨▨▨▨▨▨▨▨▨▨▨」

▨▨▨▨▨▨▨▨維三百餘步惟  大師風篁爽韻霜桂貞姿冲虛而仰止高山測量而潛深慧海然則遊方施化爲物利人住不思議昇▨▨▨▨▨▨▨▨▨▨▨▨▨▨」

▨▨▨▨▨▨▨▨▨作群生之慈父爲一切之導師者矣傳法弟子玄讓禪師行熈禪師等四百餘人俱獲髻珠共傳心印終副法王之嗣永▨▨▨▨▨▨▨▨▨▨▨▨▨」

▨▨▨▨▨▨▨▨▨▨金血誠如玉所冀相保而傳芳不朽共論而示慶無窮由是猥降表章聞於  天鑒」

▨▨▨▨▨▨▨▨▨▨▨▨所以諡曰眞空大師塔名普法之塔豈謂忽頒  丹詔申命下臣逈述高文式揚懿躅彦撝詞林一葉學海微▨▨▨▨▨▨▨▨▨▨▨▨▨▨」

▨▨▨▨▨▨▨▨▨▨▨▨▨▨▨▨故實粗著鮮文銘曰」

▨▨▨▨ ▨▨▨▨ ▨▨▨▨ ▨▨虛空 天人慕化 道俗欽風 大千之界 相契不窮 從此一花 曹溪爲祖 倬哉義公 ▨▨▨▨ ▨▨▨▨ ▨▨▨▨ ▨▨▨▨」

▨▨▨▨ ▨▨▨▨ ▨▨▨▨ ▨▨▨▨ ▨▨▨▨ ▨▨▨▨學者忘疲 毉門多病 志道有期 宴坐方秋 入於寂滅 宰輔聞▨ ▨▨▨▨ ▨▨▨▨ ▨▨▨▨」

歲次己亥八月十五日立 刻者崔煥規」

  (陰記)

小伯山大師臨遷化之時遺誡」

告諸大衆吾今已至西垂之時存居數日之」

內不愁早霜侵春花豈憂黃葉落淸溪斯納」

中之事禮徒之宗揖上如父母愍下謂赤子」

上下和合愼莫浪藉吾在之時常有暴之」

事况復己後恐若爲也莫爲小小眷屬親情」

東走西走慢閑過日各自護持毳衣綴鉢到」

處無難從上巳來第一不累門風卽是也南」

北之中依住此山七八年之間十方同侶尋」

光覔色逕冬過夏隨分不少隨時逐世別無」

軏則應是之理又无蕩逸不失棟梁可非之」

事如避火坑從頭不行直至大小常護欺嫌」

如法住持我將今往莫以世相之意亂慟非」

常今生已盡來來世世同會法席」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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