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창씨개명 때문에 일제시대 한국인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사실 이 창씨는 일본이 기원이 아니라 한국이 기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필자는 본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백제인들의 경우 부여씨에서 갈려 나온 성들 (대개는 두 글자 성이다)이 꽤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종래 별개의 성으로 생각한 흑치씨라던가, 동성씨, 고이씨 등 많은 성들은 부여씨에서 갈려나왔다고 보는 주장이 유력한 것으로 안다.
다음으로 아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흠명기)
백제 부여창이 고구려인에게 나노리 할 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여창이 자신은 고려왕실과 "동성"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여씨는?
스스로는 성이 고씨이고, 씨는 부여씨로 성과 씨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개념은 고구려에서도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개념으로 매우 특이한데, 성과 씨를 구분하는 관념자체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니 그것 자체를 특이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백제의 경우 성과 씨의 인식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스스로 계속 "창씨"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실제로 부여창은 자신의 성은 고구려와 같은 "고씨"이지만, 씨가 "부여씨"라고 보았겠지만,
부여씨에서 명확히 갈려 나온 것이 분명한 성들은 또 다시 "창씨"한 셈이다.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분명 아픈 기억이지만, 백제의 창씨 유습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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