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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타다 남은 활옷, 문득 떠오르는 옛날 이야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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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의류학자 난사 석주선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창덕궁을 드나들고 있었다. 창덕궁 창고에서 먼지를 벗삼고 있던 조선시대 공주의 혼례복-활옷을 복제하기 위해서였다.

1:1로, 옷감부터 수놓는 법, 수실 색깔까지 그대로 만들기로 했다. 당연히 실측이 뒤따라야 했고, 당시 창덕궁 안에 있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협조를 얻었다.

어느 날이었나, 난사 선생이 작업실에 와 보니 작업 중이던 활옷이 어딘가 달라보였다. 수실 색이 바뀐 건 물론이고 수놓은 무늬나 배색이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그야말로 그 수실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들어오자 매섭게 꾸짖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옛 어른들의 솜씨를 재현하는 것이지 창작이 아니다."

제자들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희도 알지만 너무 촌스러워서 솜씨를 부려보았어요."




얼마 뒤 활옷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즈음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난다.

대한제국 궁내부, 일제강점기 이왕직부터 이어지던 (그리고 6.25 전쟁을 어찌어찌 넘겼던) 온갖 황실 관련 문헌과 자료들이 상당수 소실된다.

난사 선생은 소식을 듣고 주저앉았다. 자신과 제자들이 복제한 그 원본 활옷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창덕궁에 달려가 망연자실 그 광경을 보던 난사 선생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를 도와주던 직원이었다.

그는 불탄 자리를 뒤적뒤적하더니 무언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선생의 손에 쥐여주었다. 타다 남은 활옷 한 조각이었다.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책-<숨어사는 외톨박이>였나 <털어놓고 싶은 말>이었나 기억이 정확치 않은데-에서 이 내용을 읽고 영 잊히지 않았는데, 오늘 그 전설 같은 이야기 근거를 만났다.

그런데 저 도안의 배치며 색감 어디가 촌스러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지 못하겠다.

나 자신이 촌스러워서 그런 것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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