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중국과 한국의 선배들을 평하면서 우리의 백운거사 형님도 논한 적이 있다.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요사이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엮은 《기아箕雅》의 목록을 보니 이규보의 문장을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는데, 내 생각에 그 논의는 매우 옳지 못하다.
시작부터 쎄게 나오신다. 까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논지를 전개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데....일단 읽어보자.
이규보의 시는 동방에 명성을 떨친 지가 오래되었으니, 선배 제공諸公들도 모두 따라서 미칠 수 없다고 추앙하였다. 이는 그의 재능이 민첩하고 축적된 식견이 풍부하여 많이 짓고 빨리 짓기를 겨루자면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조어造語 능력이 있어 과거 사람들의 언어를 답습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으니, 또한 시인으로서의 재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 아까 까겠다고 했는데 칭찬을 잔뜩 늘어놓는다. 뭔가 아리송해지는데, 그래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 But가 있게 마련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는 학식이 비루하고 기상이 용렬하여 시의 격조가 비천하고 잡되며 언어가 잗달고 의미가 천박하였으니, 고체시古體詩, 율시, 절구 수천 수백 편 가운데 한 자 한 구도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광활한 의미를 담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기뻐하며 ‘남들이 쓴 적이 없는 말’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다 서응徐凝의 나쁜 시와 같은 부류이니, 참으로 엄우嚴羽가 이른바 “저열한 시마詩魔가 폐부에 들어간다.”라는 경우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계속 읽어보면....
당시 사람들은 그가 풍부하고 민첩한 글로 독장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외경하여 심복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 글을 논할 적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3, 4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시만 가지고 말한 것이고 다른 문장의 경우는 깊이 논할 가치가 더욱 없으니, 비록 사詞, 부賦, 변려문騈儷文 중에 취할 만한 것이 상당히 있기는 하나, 만약 그것들이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등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압도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된다고 평한다면 수긍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문장을 논할 적에 누구 한 사람이 으뜸이라고 단정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문장은 목은을 대가로 추앙해야 하고 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을 훌륭한 시인으로 추앙해야 한다. 목은은 비단 문장으로만 대가인 것이 아니라 시도 규모가 크고 호방하여 그 기상이 볼 만하니, 이규보가 도량이 좁은 것과는 같지 않다.
- <농암집> 권34, 잡지雜識 중에서
백운거사가 그렇게 도량 좁은 캐릭터는 아닌 것 같았는데, 농암 선생이 보기엔 그렇게 느껴졌는가보다. 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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