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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도 기와집이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제주 유적에서 기와가 확인되는 건 고려시대 이후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이른바 탐라국 시절 층위에선 기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국립제주박물관의 전시를 보다보면, 육지의 삼국시대~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를 다루는 '탐라실'에 기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지 국립박물관의 삼국시대 진열장이 토기 1/3, 금속 1/3, 기와 1/3인 듯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그 시절 탐라의 도회지엔 초가지붕만이 그득했겠군요.
물론 그렇다고 탐라국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폄하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탐라가 육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 그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텐데(자연환경이건, 경제적 조건이건) 아직 그걸 잘 모를 뿐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짚이는 점이라면 제주의 토질입니다.
지금도 제주에서 옹기를 구울 수 있는 차진 흙은 서쪽 대정 일대에서만 난다고 합니다.
사진은 국립제주박물관의 '고려실'에 있는 고려시대 기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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