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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파주 임진강 임진나루 발굴성과와 만기요람의 임진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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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나루터 진서루 기초 흔적



근자 파주 임진나루 터가 발굴되었다. 파주시와 한백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임진나루터와 그 인근 임진진 기초가 드러난 것이다. 그에 대한 발굴성과는 아래 우리 공장 보도를 참조하라.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임진강 진서문 규모 드러났다

송고시간 | 2019-05-30 11:51

길이 7.4m·너비 4.5m 확인…"조선시대 성문 중 대형"



임진진臨津鎭, 곧 임진나루에 대한 기본 정보는 무엇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篇 3 총융청摠戎廳 제진(諸鎭)에 수록된 다음 정보가 골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고전번역원 옮김과 그 제공 저본이다. 


19세기 지도 경강부임진도에 나타난 임진진.



2진(二鎭) 2진은 지방인 파주 중영에 속한다.임진진(臨津鎭) 파주(坡州)에 있다. 처음엔 낙하도(洛河渡)에 있다가 옮겨서 임진도에 설치하고, 별장을 두어 병조에서 파견하다가, 숙종 46년 경인(1770년)에 약방제조(藥房提調) 민진후(閔鎭厚)가 계청하여, 본청에 이속하게 하였다. 경군의 교련관이 자의(自意) 임용하여 파견한다. ○ 영종 30년 갑술(1754년)에 진서문(鎭西門)을 세우고 좌우의 익성(翼城)을 쌓고, 군량미와 환조(還租)를 저장하고 모두 모곡(耗穀)을 받아서 진속(鎭屬) 별장 1명, 대장(代將) 1명, 초관 2명, 기패관 3명, 군기감관(軍器監官) 1명, 진서문 부장(鎭西門部將) 1명, 표하군 23명, 아병 2초, 서원 2명, 고지기 1명, 통인(通引) 2명, 기수 4명, 부목지기[負木直] 1명, 산지기 1명 의 경비에 쓴다. ○ 진부(津夫) 74명, 진선(津船) 10척 진부는 위전(位田)ㆍ위답(位畓)이 있다. 진선(津船)은 해마다 1척씩을 새로 만들며 2척을 수리한다. 물자는 돈 200냥을 선혜청(宣惠廳)에서 받아 온다. ○ 본진의 얼음이 얼고ㆍ얼음이 풀리고ㆍ장마에 물이 붇는 상황을 진장(鎭將)이 본영(本營)에 보고하여 비변사에 전보(轉報)한다. ○ 정종 14년 경술(1790년)에 별장이 금위영에 이속되었다가 금상 ‘순조’ 2년 임술(1802년)에 도로 본청에 붙였다. 처음에 금위영의 노량진을 장용영(壯勇營)에 이속하였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대신 ‘금위영에’ 보냈다가 장용영이 폐지된 뒤에 환속(還屬)되었다. 장산진(長山鎭) 파주에 있다. 영종 30년 갑술에 우참찬(右參贊) 홍봉한(洪鳳漢)이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의 요로인 마포(馬浦)가 여울이 얕아서 방수책(防守策)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연품(筵稟 임금을 면대(面對)하여 품의함)하여 설치하였다. 돈대(墩臺)를 쌓고 둔전을 설치하며, 군량미를 내놓아 모곡을 받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경군의 교련관이 자의 임용하여 파견한다. ○ 별장 1명, 대장(代將) 1명, 초관 2명, 군기감관 1명[軍器監官一員], 기패관 3명, 돈대감관 8명, 표하군 23명, 아병 2초, 서원 2명, 고지기 1명, 통인 2명, 기수 4명, 산지기 1명, 돈대지기 8명.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 김양기 그림에 드러난 임진진 진서루



[諸鎭]

二鎭。二鎭屬於地方。坡州中營。 ○臨津鎭。在坡州。初以洛河渡移設臨津渡。置別將。自兵曹差送矣。肅宗庚寅。藥房提調閔鎭厚啓請。移屬本廳。京敎鍊官。自辟差送。 ○英宗甲戌。建鎭西門。築左右翼城。峙餉米還租盡分取耗。接濟鎭屬。別將一員。代將一員。哨官二員。旗牌官三員。軍器監官一員。鎭西門部將一員。標下軍二十三名。牙兵二哨。書員二名。庫直一名。通引二名。旗手四名。負木直一名。山直一名。 ○津夫七十四名。津舡十隻。津夫。有位田,畓。津舡。每年一隻新造。二隻改槊。物力。錢二百兩。自宣惠廳受來。 ○本津合氷,解氷,潦水漲溢形止。鎭將報本營。轉報備局。○正宗庚戌。別將移屬禁衛營。壬戌。還屬本廳。初。禁衛營露梁鎭移屬壯勇營。故因傳敎代送。壯勇營罷後。還屬。 ○長山鎭。在坡州。英宗甲戌。右參贊洪鳳漢以兩西要路馬浦淺灘不可無防守筵禀。設置。築墩臺。置屯田。餉米糶糴取耗。置別將。京敎鍊官。自辟差送。○別將一員。代將一員。哨官二員。軍器監官一員。旗牌官三員。墩臺監官八員。標下軍二十三名。牙兵二哨。書員二名。庫直一名。通引二名。旗手四名。山直一名。墩臺直八名。



이에는 임진진 설치 후 나중인 영종, 곧 영조 30년 갑술(1754년)에 진서문鎭西門을 세우고 그 좌우로는 익성翼城을 쌓고, 군량미와 환조還租를 저장하고 모두 모곡耗穀을 받아 진속鎭屬의 경비에 쓴다고 하면서, 그 진속에 대해 "별장 1명, 대장代將 1명, 초관 2명, 기패관 3명, 군기감관軍器監官 1명, 진서문부장鎭西門部將 1명, 표하군 23명, 아병 2초, 서원 2명, 고지기 1명, 통인通引 2명, 기수 4명, 부목지기[負木直] 1명, 산지기 1명"이라 했으니, 지금으로 보면 임진진은 그 운영에 필요한 제반 인원과 예산을 자체 조달한 조직임을 안다. 


진서루 북쪽 장대석 다짐



간단히 말해 임진진은 국방상 중요한 곳이라 해서, 국가 기간 국방시설로 국영으로 관리되었지만, 그 운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공공기업과 매우 흡사한 조직이었음을 안다. 


이는 결국 둔전제 전통과 닿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국가가 기간 국방시설로 나루를 여겼다는 점이다. 


진서루 문지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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