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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평양의 지리적 의미

by 초야잠필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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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여기가 잡곡농경과 도작의 접경지대였다는 데 있다. 

잡곡농경이라는 건 도작의 부차적 보조수단으로서의 잡곡재배가 아니라 

도작 없이도 완결성을 갖춘 잡곡 농경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오곡에 맞다"고 할 때의 그 오곡.

이것이 바로 발해만 주변과 남만주 일대의 잡곡농경을 말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부여와 초기 고구려는 이 잡곡농경에 기반하여 일어났다. 

대동강유역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까지 줄줄이 이어진 섬을 타고 넘어 들어와 남하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비옥한 땅으로 

여기는 도작도 가능하여 도작과 잡곡 농경이 만난 최초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도 이 지역으로 손을 뻗치면서 비로소

잡곡과 도작 두 가지 농경을 모두 포괄하는 정치체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점유한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개방된 사회 웅장한 기상 이런 모호한 실체가 아니라 

잡곡농경에서 일어나 도작농경에 맛을 들여 

아예 중심지를 도작농경의 핵심부로 옮겨버린 데 있다. 

잡곡농경에서 일어나 도작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 반대 방향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잡곡농경 하면 무슨 도작의 보조수단으로

잡곡농경만으로는 발달된 문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천만의 말씀이다. 

부여와 고구려가 위치한 지역을 보라,

거기가 쌀농사가 되었을 것 같은가? 

부여와 고구려는 잡곡만으로 일어난 문명임이 분명하고,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은 조선초기까지도 벼농사가 아예 안 되는 곳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지기수였다. 

조선초기 육진 개척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쌀농사로 사민이 된 것이 아니고, 

잡곡으로 사민이 되었고, 

여기까지 쌀이 밀고 올라간 것은 그후에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고 보이는데, 

한 번 쌀농사가 이 지역에 퍼지자 여기는 한반도 국가의 영유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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