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여기가 잡곡농경과 도작의 접경지대였다는 데 있다.
잡곡농경이라는 건 도작의 부차적 보조수단으로서의 잡곡재배가 아니라
도작 없이도 완결성을 갖춘 잡곡 농경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오곡에 맞다"고 할 때의 그 오곡.
이것이 바로 발해만 주변과 남만주 일대의 잡곡농경을 말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부여와 초기 고구려는 이 잡곡농경에 기반하여 일어났다.
대동강유역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까지 줄줄이 이어진 섬을 타고 넘어 들어와 남하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비옥한 땅으로
여기는 도작도 가능하여 도작과 잡곡 농경이 만난 최초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도 이 지역으로 손을 뻗치면서 비로소
잡곡과 도작 두 가지 농경을 모두 포괄하는 정치체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점유한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개방된 사회 웅장한 기상 이런 모호한 실체가 아니라
잡곡농경에서 일어나 도작농경에 맛을 들여
아예 중심지를 도작농경의 핵심부로 옮겨버린 데 있다.
잡곡농경에서 일어나 도작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 반대 방향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잡곡농경 하면 무슨 도작의 보조수단으로
잡곡농경만으로는 발달된 문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천만의 말씀이다.
부여와 고구려가 위치한 지역을 보라,
거기가 쌀농사가 되었을 것 같은가?
부여와 고구려는 잡곡만으로 일어난 문명임이 분명하고,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은 조선초기까지도 벼농사가 아예 안 되는 곳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지기수였다.
조선초기 육진 개척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쌀농사로 사민이 된 것이 아니고,
잡곡으로 사민이 되었고,
여기까지 쌀이 밀고 올라간 것은 그후에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고 보이는데,
한 번 쌀농사가 이 지역에 퍼지자 여기는 한반도 국가의 영유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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