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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처럼 한국사에서
도작의 개시와 본격적 농경의 시작을 일치시키는 일본 농업사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부여와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도작의 개시와 본격적인 농업의 시작을 일치시킨다면
도대체 부여와 고구려는 그럼 무엇이라는 것인가?
부여와 고구려는 도작이 없었다.
고구려는 도작의 맛을 본 것은 대동강 유역을 손에 넣으면서부터다.
부여와 고구려, 이 두 형제문명은
명백히 잡곡농경에 기반한 것으로서,
한국사의 농업사 기술에서
지금처럼 도작과 본격적 농업의 개시를 일치시키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옳다.
이러한 시각은 야요이시대에 도작이 건너가면서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한 일본의 시각을 한반도에 그대로 연장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도작농경에 기반한 한반도 중부 이남의 문명만 선택적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부여와 고구려 문명은 어떻게 한국사에 포괄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잡곡농경에 대한 이해를 한국사에서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지금은 이 부분이 너무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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