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원래 유교의 고례와는 거리가 먼 나라라
성리학이 들어오고 주자가례가 들어와도
원래의 풍습을 바꾸는데 꽤 오래 걸렸다.
이미 주자가례는 조선이 개국되던 시기에는 들어와 있었지만,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16세기나 되어야 주자가례 흉내라도 내게 된 것이니,
밥만 먹으면 사서집주 읽고 주자가례 들춰보던 양반들이
가례 따라 움직이는데 무려 20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런데,
18세기까지도 전 국민 절반이 노비로
아마도 그 중 대다수는 제사를 지냈을 리도 없고,
족보도 없었을 나라에서
불과 백여년 만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양반 족보 없는 집이 없게 되었다.
놀랍지 않은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반들도 200년 걸린 풍속을
노비출신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짧은 시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명절만 되면 제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대 유교국가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
한국이 지금처럼 집집마다 양반 코스프레를 하게 된 것은
19세기 말 당시 양반흉내를 내야 군역도 빠지고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 자기가 유학이라고 자칭타칭 호적에 올린 사람들은
싫건 좋건 족보도 하나 사다 장만해야 했고 (이것이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에서 대동보가 유행한 이유이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공명첩도 하나 사서 벼슬 이름 족보에 올리고,
양반들이 제사 어찌 지내나 유심히 보아,
홍동백서니 어쩌니 하는 근거도 없는 제사 지내는 법이 횡행하게 된 것 아닌겠는가.
결국 조선 전-중기 진짜 양반들이 주자가례 보고 이풍역속하려 했던 것보다
19세기 가짜 양반들이 제사 지내고 족보 장만하려 했던 것이 더 절실했던 셈이 되겠다.
지금 우리나라 전국민이 명절 때만 되면 제사 지내고 귀성하는 광풍은
따지고 보면 유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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