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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한국근대사의 이주갑 인상론

by 신동훈 識 2025.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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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아시다시피 일본고대사에는 이주갑인상론이라는 요물이 있다. 

일본 고대 기록을 주변 국가와 대조해 보니 

대략 120년 정도 끌어올린것 같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이렇게 끌어올린 연대는 길게 늘여지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주변국가와 기록이 제대로 연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되겠다. 

한국근대사가 딱 그렇다. 

한국사는 필자가 보기엔, 

약 100-200년 정도 발전 정도가 빨리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노비 사역 같은 경우는 

필자가 보기엔 18세기 중반까지도 향촌사회의 가장 흔한 농업생산양식이었고,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해소되는 과정에 있었으니 

이런 형국에서는 지주 전호제도 그 이전에는 주류였다고 보기 힘들다. 

소농을 기반한 지주 전호제의 소작을 대규모로 운영하여 

나온 결과물을 상업작물로 내다 팔아 큰 지주로 성장하는, 

이러한 지주도 얼핏 보기엔 17-18세기에는 나왔을 것 같지만, 

작물의 상업적 판매를 전제한 지주는 개항 이전까지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의 맹아건, 광작운동이건 뭐건 간에

근대의 맹아로 볼 만한 움직임들은 19세기 중반은 되어야 완연해지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구한말 개항기로 들어선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19세기는 18세기 중후분의 해체기를 거쳐 

근대가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으로서, 

이러한 흐름을 한국 근대사는 대략 17-18세기 정도에 설정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를 일컬어 딱 한국 근대사의 이주갑 인상론이라 할 것이다. 

농업을 대규모로 경영하여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하는 

그런 자본가적 농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과 화폐경제가 성숙해야 가능한데. 

안타깝지만 조선시대 우리의 시장과 화폐경제는 이 단계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따라서 노비사역을 중심한 조선후기의 양반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시장에 내다팔아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자기들끼리 증여하고 상응하는 것을 받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자기가 생산한 것을 보전하는 형태의 부만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 시장을 보고 농경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원시적 형태는 

개항 이후, 정확히는 일본 쌀 시장을 보고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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