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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하다의장何多宜藏이 법사法師? 이런 법호法號는 단군조선 이래 있은 적이 없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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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여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 扶餘扶蘇山城出土金銅光背에 대해서는 내가 여러 번 여러 자리에서 다뤘으니 개중 하나가 아래라


부여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扶餘扶蘇山城出土金銅光背)에 대한 나의 중간 결론

1. 扶餘 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 뒷면 銘文은 ‘何多宜藏治佛’이며, 그 意味는 “하다의장(何多宜藏)이라는 사람이 佛像을 造成했다”는 뜻이다. 이를 從來에는 ‘何多宜藏法師’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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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말 백마강 황포돛배 타고 싶다는 제주댁 모시고 사비를 행차한 길에 국립부여박물관에 들린 바, 저 유물이 빠질 수는 없으니 여전히 화려한 백제문화를 웅변하는 증언자로 여전히 상설전시실을 지키고 있는 바,



저에 대한 안내문이 이것이라



문제는 이것이라, 곧 판독이 여전히 '何多宜藏法師'라, 저 판독이 저걸 발굴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그 발굴보고서에 저리 수록된 이래, 저 판독을 고수하고 있으니,

암튼 저대로라면 저 판독은 "하다의장 이라는 법사"라는 뜻이며, 예서 하다의장은 스님 이름이 되겠다.

승장僧匠이라 해서 기술직 스님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이 경우는 하다의장 이라는 스님이 직접 저걸 만들었다는 의미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직접 돈을 대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만들게 한 이른바 발원자가 되겠다.

하지만 다시 지적하지만, 저건 판독이 완전한 오류라, '何多宜藏法師'가 아니라 '하다의장 치불 何多宜藏治佛'이라, 이는

하다의장 이라는 사람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뜻이라, 하다의장이라는 기술자가 지가 만들었음을 표시한 징표다.

'何多宜藏法師'가 잘못된 판독임은 우선 글자가 그렇지 아니하고, 또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은 법사라면 틀림없이 그 앞은 스님 법호일 텐데 저런 법호 봤는가? 없다.

법호는 모름지기 순한문 뜻 글자로 지어야 하며, 저런 식으로 하다의장이라는 백제식 성씨와 이름을 그대로 쓰고 법사라 한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은 저 글자를 새긴 모양이다.



보다시피 가는 못 같은 끝이 날카로운 도구로 긁은 것이다. 왜 저리 했겠는가? 저걸 만든 하다의장 이라는 사람이 이건 필생의 역작이라 생각해서 이건 내가 만들었다는 흔적으로 반드시 남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걸 표시할 방법이 없었다.

그걸 정식으로 새기는 일을 저 광배와 그것이 장식한 불상을 발주한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넌 내 돈 받아 단순히 불상을 만드는 장인에 불과하다, 어디 감히 네 이름을 새기느냐? 개쪽 까이니, 열받아서 세심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그런 흔적으로 저리 슬쩍 새겨 넣은 것이다.

그 은근슬쩍 긁적거려 놓은 글자가 천오백년 천사백년이 지나 마침내 출현한 것이니 이 어찌 기적이 아니리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하다의장...그는 '하다' 라는 복성을 사용한 백제 장인으로 이름은 '의장'이었다. 이 하다 씨 일족이 바다 건너 왜로 가서도 저 일을 종사했으니, 왜로 가서 그들이 사용한 성씨는 궁월弓月이었으니, 이 궁월은 실은 일종의 이두라, 현대식 새김으로 읽으면 '활달'이라, 이것이 백제 당시에는 '하다' 정도로 읽은 것이다.

저와 같은 점들에서 저 불상이야말로 국보 중의 국보다.

덧붙여 저번에 견주어 저 광배 모습이 약간 변모했으니, 직전 저 광배 모습은 아래와 같다.


손질 필요한 부소산성 백제금동광배 전시

손질 필요한 부소산성 백제금동광배 전시

부소산성 출토 사비백제시대 금동광배다. 2017년 전시 모습인데 이리 하면 곤란하다. 현재도 이런 모습으로 전시가 계속 중인 듯 하다. 이게 불상 뒤꼭지에 박히는 전면인데 이거 백제공예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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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방문 때 윤형원 관장과 함께 저 유물을 둘러보며, 나는 윤 관장께 저 문제를 지적했거니와, 윤 관장이 저건 바꾸겠다고 했으니, 이후 저걸 추가 보존처리해서 저와 같이 바꿔 놓았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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