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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백수 할머니로 등장한 1962년 서른아홉살 브라질 한인 이민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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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공장 멕시코 특파한테서 연락이 오기를 백옥빈 씨 수기 원문을 구할 수 없느냐는 문의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원본을 보관 중이니 필요하다면 접촉해서 보내주겠다 했는데 이후 연락이 끊겨 이 사안은 흐지부지하고 말았으니,

올해가 브라질 한인 이민 60주년이라 우리 공장 편집국에서 그 특집을 기획하고, 백옥빈씨는 그 이민단 일원으로 당시 이민에 얽힌 생생한 증언을 일기를 남긴 까닭이었다.

이 일기를 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접하고는 2014년 4월 30일, 그것을 소재로 삼은 기사를 만들어 송고했으니, 그것이 이 블로그에도 그대로 전재한 아래 제목 글이라,


1962년, 백옥빈 씨가 브라질행 치차렌카 호에 몸을 실은 까닭은?

1962년, 백옥빈 씨가 브라질행 치차렌카 호에 몸을 실은 까닭은?

치차렌카호에 실은 반세기 전 브라질 이민의 꿈 송고시간 2014-04-30 17:25 김태식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브라질 속의 한국인'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옥빈(白玉彬) 씨는 지구

historylibrary.net



우리 공장에서 매일 천 건에 달하는 기사가 송고되거니와, 도대체 무슨 뉴스가 어떤 식으로 생산 소비되는지 내가 어찌 다 일일이 추척하겠는가?

그러다가 그제 우연히 아래 우리 공장 기사를 접하게 되었으니


[집단이민 60년] ④ <인터뷰> 브라질 이민史 필독서 남긴 '산증인' 백옥빈 할머니
송고시간2023-02-10 08:00 요약beta 공유 댓글 글자크기조정 인쇄
의사 남편·자녀 4명과 1963년 도착…영농이민 실패 후 상파울루 정착
"정착 초기 자녀들까지 공장 취업…힘들어서 우는 모습 보고 마음 아파"
"가족·신앙의 힘으로 착근"…이민·정착과정 담은 '백옥빈 일기' 집필

https://www.yna.co.kr/view/AKR20230209011300087?section=search

[집단이민 60년] ④ <인터뷰> 브라질 이민史 필독서 남긴 '산증인' 백옥빈 할머니 | 연합뉴스

(캄피나스[브라질]=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김지윤 통신원 = 국내 최고의 사범대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년의 여성은 60년 ...

www.yna.co.kr



이를 보고는 잉? 백옥빈씨가 여전히 생존했다고? 놀랐으니, 이런 줄 알았더래면, 또 2014년 당시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어케든 백씨를 접촉해 관련 인터뷰라도 진행했을 것이다. 내 취재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브라질 한인 이민 특집을 쓴다며 멕시코 특파가 브라질 현장으로 날아간 모양이라, 그에 관한 기존 관련 기사들을 검색하다가 아마 2014년 내 기사가 걸려 그 특파가 나한테 저와 같은 문의를 했을 것으로 본다.

저 브라질 캄피나스 發 소식에서 더 놀라운 점은 60년 전에 생생한 이민 일기를 쓴 할머니가 올해 백수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장수 시대라 해도 이역만리에서 기록적인 장수를 하는 할머니가 경이스러울 뿐이다. 더구나 그 억센 팬데믹까지 이기고선 예까지 왔다는데 경의를 표한다.

2014년 내 기사를 보면 1962년 이민 결행 당시 "서울 영등포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그만둔 서른아홉 살 백씨는 남편이자 의사인 고계순 씨, 그리고 슬하 아들 3명과 딸 1명과 함께 탔다"고 하니, 저때 이미 서른아홉이었다.

브라질 이민 60년이라 해서 저때 첫 이민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전에 이미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브라질로 들어간 한인은 있었다.

1962년 12월 브라질로 향하는 이민선



앞 첨부 사진은 1956년에 브라질로 이주한 한 한인 가족이다. 다만 1962~63년이 브라질 한인 이민사에서 중요한 까닭은 정부에 의한 조직적 대규모 집단 이민이 저때 있었던 때문이라, 저들과 그 후손이 주축이 된 조직이 브라질한인이민사회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찾아봐야겠지만,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3년 전이던가? 그 무렵은 쿠바 사탕수수농장 노무자로 한인이 대거 이민을 결행한 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미 문화부장도 끝나고 지금의 K컬처기획단 전신인 한류기획단을 만들어 도대체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나는 저 사안을 주목하고서 모 기관과 접촉해 현지 취재를 기획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다시피 이내 코로나가 지구촌을 휩쓰는 바람에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데 나라고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저런 일들을 실행한단 말인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사는 날을 점점 축적하다 보니, 저 말은 교정해야 한다. 운구기일이라, 제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잘해도 운빨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더라.

그래서 사람은 시운을 타고 나야 하며, 그리 태어나서도 시운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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