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연구편력 후반기는
학제간 통섭, 혹은 학제간 연구를 해야 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정부지원 연구비들이 학제간 연구를 지원했으며
실제로 그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학제간 통섭은 그런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각 분야 연구자들을 모아 놓는다고 학제간 통섭이 되는 것이 아니다.
1+1=3이 되어야 비로소 학제간 통섭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1+1=1.5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며,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도 많다.
학제간 통섭은 다른 연구분야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연구를 재해석 하는 움직임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반대로 내 연구의 기조를 가지고 상대편의 연구를 재해석할 수도 있다.
어느 쪽도 자기 분야 이외의 연구의 흐름을 잘못 이해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학제간 연구는 아슬아슬한 외다리를 걷는 일과 같다.
특히 오랫동안 자기가 잘 아는 것 외에는 말하는 것을 삼가토록 교육받은 전문연구자로서는
이러한 학제간 연구는 피해야 할 여러 가지 작업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만드는 그런 부분도 있다.
학제간 연구라는 것이 최근 10여년간 한국학계에서도 일종의 트랜드가 되어 있는데,
이러한 통섭적 연구의 위험성을 무릅써야만 비로소 피안에 이를 수 있는
쉽지 않은 연구가 바로 학제간 연구라는 점에서,
이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한 글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최근 이 분야 저 분야 알던가 모르던가 글로 넘나드는 필자의 입장에서
간단히 글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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