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번에 신라시대 인골이 왕창 쏟아져 나온 경주 탑동 28-1번지가 어디메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 우선 다음지도를 첨부한다.
이를 좀더 세분화해서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보건대
발굴지점이 경주 월성 남서편이면서 경주 오릉과는 실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인접지점이라, 이짝에는 동네가 있다. 도당산 북쪽 기슭이어니와, 실은 남산 자락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 천관사지랑은 실은 같은 지역이다.
월성과는 남천이라는 시내를 사이고 두고 마주 본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전형적인 농촌 풍경인 이 동네가 실은 온통 공동묘지라는 사실은 2010년대 초반에 무렵 드러났거니와, 그 이전까지 이쪽이 공동묘지였을 것이라는 흔적은 좀체 없었다. 물론 오릉이 있어 있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워낙 훼손이 심해 동네로 바뀌고 논으로 변모하는 바람에 그 밑에 저와 같은 무수한 무덤이 내려앉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돌파구를 마련한 발굴이 2010년 6월 무렵이었으니, 당시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단이 탑동 21-3·4번지 소규모 단독주택 신축 예정지 790㎡를 발굴조사하다가 목재가 자연 탄화하는 과정에서 숯처럼 변한 목관 흔적과 함께 옻칠을 입힌 나무 칼집에 동검銅劍이나 철검을 끼운 칠초동검漆鎖銅劍과 칠초철검漆鎖鐵劍을 비롯한 유물을 다량으로 발굴했다. 기타 칼자루 끝장식인 검파두식劍把頭飾, 청동 팔찌, 목걸이, 그리고 시신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칠기 부채 등이 무더기로 수습됐다.
목관을 묻은 묘광墓壙은 평면 모죽임 장방형으로,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마련했으며 크기는 길이 296㎝, 너비 144㎝였다. 목관은 발견된 흔적으로 볼 때 묘광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안치됐으며 평면 형태는 'ㅍ'자형, 크기는 길이 196㎝, 너비 84㎝로 나타났다.
이 발굴은 여로 모로 신라고고학 혁명이었다. 무엇보다 경주 평야 일대에 신라가 태동하던 기원전후 무렵에 강력한 권력을 갖춘 권력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으니, 그 축조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라, 신라가 엄연히 이 시기에 존재했음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는 탑동 일대가 묘지라는 서광을 연 사건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2013년에는 마침내 인골이 출현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교동 94번지(실제 발굴지점은 교통 93-2번지라고 주진옥 선생이 방금 확인했다.) 일원 천원마을 진입로 확·포장 공사 부지를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 생활유적과 함께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인골 1구를 안치한 신라시대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를 발견했다고 12월에 발표한다. 교동이라 하지만 탑동과 인접하는 지점이다.
이 발굴에서는 뚜껑을 제외한 목관이 완벽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그에 따라 목관을 어떻게 짰는지를 확실히 알려주며, 더구나 매장할 때 그 상태로 인골이 완벽히 남았다는 점이 획기적으로 평가됐다. 목관은 길이 230cm에 너비 90cm였다.
관 내부에는 인골이 온전한 채로 발견됐다. 안에서는 유개고배有蓋高杯를 비롯한 토기류 11점이 발견됐다.
이 인골 발굴 때 나는 경주에 있었다. 그때 현장을 찾았는데, 내가 영 이상한 점이 토질이었다. 동네 바닥을 파고 들어가니 그 아래는 온통 뻘이었다. 시커먼 진흙이었다.
이 점이 수상쩍기 짝이 없었으니, 첫째 이런 진펄에다가 신라사람들은 왜 무덤을 썼으며 둘째, 그렇기에 인접 지점 다른 데서도 이런 상태로 인골이 더 발견되지 않을까 상상했더랬다.
이후 탑동 일대에 대한 작은 발굴이 두어 번 더 있었다. 2018년에는탑동 6-1번지와 6-6번지 1천336㎡ 부지에서 목곽묘木槨墓 8기,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18기, 석곽묘石槨墓 4기, 옹관묘甕棺墓) 4기라는 4~6세기 신라시대 무덤 34곳이 무더기로 출현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왕청나게 터진 것이다. 인골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며, 더구나 개중에는 키 180센티미터 타이탄 남성도 있었다.
8년 전 내가 품은 의문이 단숨에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탑동은 한국 고인류학 고병리학 메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극심한 산성토양이라 뼈가 제대로 남아있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탑동 공동묘지는 기적으로 뻘흙인 까닭에 인골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2천년,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제 고고학은 고고학을 떠나 고병리학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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