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통신>
1. 당근밭에서 보물을 캐다
혼자 사는 처지에 당장 필요한 물건은 왜 그리 많은지, 당x마x이 그럴 때 꽤 유용합니다. 뭐가 되었든 검색해서 직접 거래하는 일이 가능하니까요. 예전 x고x라도 비슷했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여기 더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그러다보니 쉬는 날, x근x켓 앱에 뭐든 검색어를 넣어서 뜨는 걸 찾아보는게 낙 아닌 낙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상당히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됩니다.
제주 명필 소암 현중화(1908-1997) 선생(이하 인물 경칭 생략)의 소품 하나가 싼값에 올라와 있던 겁니다. 서귀소옹이라 했으니 70-80년대 이후 만년 작품인데,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을 적어놓았군요.
구름은 무심히 봉우리에서 나오고 / 새가 천천히 날으니 돌아감 알겠네
표구를 하지 않고 접어놓아 구멍이 하나 나 있었지만, 감상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약주를 좀 드시고 쓰셨는지 획이 유달리 거침없습니다. 글자도 하나 위치를 바꾸어 쓰신 것이, 취기 때문에 헷갈리셨는지? 하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습니다.
내용보담도 글씨에 기운이 느껴집니다. 종이돈 몇 장을 건네고 받아와 펼쳐보니 과연 소암 선생이다 싶어지네요.
당근밭에서 보물을 캐었습니다.
2. 여기서부터는 안 읽으셔도
되는 것이, 평소 책도 읽고 작품 실물과 사진을 찾아도 보면서 우리나라 붓글씨에 관해 갖게 된 생각을 이 글씨를 보며 풀어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므로, 저 사람 잘 모르는 거 아닌가 싶다면 선생님 생각이 옳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당대에 끼친 영향력이나 관직 등을 배제하고 순 작품으로 보았을 때, 20세기 한국 서예는 검여 유희강(1911-1976), 일중 김충현(1921-2006), 소암 현중화 이 세 분이 발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20세기 한국에 서예가가 이분들만 계셨던 것은 아니지요. 특히 소전 손재형(1903-1981), 평보 서희환(1934-1995) 두 분을 빼고 20세기 한국 서예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어른은 별격의 아름다움이고 개성적, 초현대적이라 할지언정 전통과 근대를 거쳐온 '한국 현대 서예'의 전범이라 하기에는 약간 주저됩니다.
소전 같은 경우 그의 특장 '한글 전서'를 두고 이론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로 '근거가 약하다'는 약점(사람에 따라 견해는 다르겠으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희강, 김충현, 현중화는 전통적 기반 위에 자기 글씨를 만들어낸 한편 저마다의 개성을 뚜렷하게 세워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유희강은 중국 유학파, 김충현은 순수 국내파, 현중화는 일본 유학파였는데, 그래서인지 글씨의 특징이 제각기 다릅니다.
유희강 글씨는 '대륙적'이라고나 할까요. 선이 굵고 호방한 해서, 행서가 압권입니다. 뇌일혈로 오른손을 못쓰게 된 뒤부터는 왼손글씨를 연마해 졸박한 맛을 극대화했지요. 그러면서도 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유컨대 뼈대가 굵고 근육이 있는 문무겸전의 장사랄까요.
김충현 글씨는 어디 하나 치우치지 않고 반듯합니다. 틀 안에 있으면서도 틀이 없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느껴지는데, 한글이건 한자건, 획이 꿈틀거리건 꿈틀거리지 않던 간에 그의 글씨에는 나면서부터 존재하는 것 같은 우아함이 있습니다. 장신구가 없어도 화장기가 없어도 그 자체로 멋진 귀인이 거기 있습니다.
현중화 글씨는 그럼 무엇이냐? 언뜻 보면 그의 글씨, 특히 행서와 초서는 아무 이유없이 흥에 겨워 쓴 것만 같습니다. 워낙 술을 즐기셔서 취필이 많아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글씨에는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흩날립니다.
한라산 나무와 풀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가르침을 얻는다는 그의 고백처럼, 자연을 그대로 붓에 옮겨 글씨로 풀어낸 것만 같습니다. 흰 옷자락 나부끼며 억새 위를 스치우는 신선이라고 해야할는지.
3. 붓을 쥔 이들이 나아갈 길은
예전엔 서예학원이 그래도 동네마다 하나 정도는 있었는데, 요즘은 어째 눈씻고 찾아도 보기가 힘드네요. 그만큼 현대인들이 붓글씨에 관심이 줄었다는 얘기겠죠.
경매 같은 데 봐도 붓글씨 가격은 (심지어 대가의 경우라도)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xx켓에도 이렇게 싸게 나오는 일이 있겠죠(그냥 버려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도요).
가끔 서예 공모전이나 협회전이 열리길래 몇 번 가보았는데, 아이유가 노래에서 읊은 대로가 아닌가 합니다. "길을 잃었다." (열심히 글씨를 쓰시는 분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말이 결코 아님을 밝힙니다)
이른바 '캘리그라피'는 제외하고, 현대인에게 붓글씨란 이제 과거의 유물일 뿐일까요? 붓글씨를 쓰는 분들이 단순히 자기만족이 아닌 그 이상을 보여주고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몇년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했던 <미술관에 서> 전시 때 지인과 함께 갔던 경험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분은 평소 옛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분입니다. 어쨌거나 제가 가자고 해서 오기는 왔는데, 시큰둥하게 대강 보더니 어느 순간 진지해지더군요.
한바퀴 돌고 문을 나서면서, 어느 분 작품이 좋더냐 물었는데 서슴지 않고 현중화와 하석 박원규(1948-현재)를 꼽습니다. 왜냐니까, 가장 자기 내면에 느낌이 와닿는 글씨였다는군요.
오늘의 사람들한테는 그 둘의 글씨가 가장 맞는 작품일거라고. 그 전시는 19세기 말부터 현대 캘리그라피까지 다 나와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소암을 꼽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한 일화가 떠오르더군요.
버나드 리치(1887-1979)라고, 홍콩에서 태어나 일본 민예운동에 깊이 참여했던 영국 도예가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20세기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 분청자가 이미 다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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