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로 남겨둔 것은 누구 물건인가
자고로 어떤 물건을 확보할 때 수량을 딱 맞추어서 준비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생길 때가 많다. 약간 넉넉히 확보해 두어야 돌발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돌발상황이 없다면, 예비로 남아도는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곗바늘을 돌려서 400여 년 전으로 가보자.
인조 9년(1631) 10월 23일, 제주목사 이진경(李眞卿, 생몰년 미상)이 보낸 말[馬]로 인해 조정에 한바탕 풍파가 일었다.
"제주목사 이진경이 예차마預差馬를 아울러 바치니 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옛 예에 목사와 판관 및 두 고을의 수령이 도임到任하면 어승마(御乘馬, 임금님 전용 말)로 합당한 말 두 필을 취하여 한 필은 가려 바치고 남은 말은 예차預差라고 일컬었다가 체직되어 올 때 사사로이 점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경은 일단 어승이라 한 이상 사사로이 점유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마침내 아울러 봉해 바친 것이다.
대정현감 이구(李球, 생몰년 미상)와 정의현감 최인건(崔仁健, 1578~?)도 똑같이 봉해 바치기를 원하였다."
제주가 명마의 고장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 기왕 내려온 김에 괜찮은 자가용 하나 장만하고 싶은 마음이 누군들 없었을까.
그러니 제주목사가 예비 어승마에 눈독을 들일 만도 하다.
하지만 이진경 목사는 좀 고지식했다고 해야할까. 예비용이라고 해도 임금님이 타셔야 하는 것이니 그냥 진봉進封한 것이다.
제주목사가 이러니 대정현감, 정의현감도 덩달아(울며 겨자먹기였을지 모르지만) 이를 바치고자 한다는 뜻을 비추었다.
그런데 이때 병조兵曺의 반응은 좀 뜻밖이다.
"조정의 뜻을 시험하여 요행으로 출세하려는 그 정상이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진경을 먼저 파직시키고 추고하는 한편, 그 말도 돌려보내어 범람한 죄를 징계하소서."
병조의 관원들 생각에, 이진경이 예비용 어승마까지 바친 이유는 청렴함을 과시하여 출세하기 위해서로 보였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았더냐?"
이에 병조에서는 이진경을 파직하고 말을 돌려보내기를 요청했다.
인조는 뭐라고 답했을까?
"이른바 예차란 것이 봉하여 바치고 남은 것이기에 사사로이 쓰기에는 불안한 듯하여 아울러 봉하여 바치기를 청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그런 길이 한 번 열릴 경우, 수령이 진경처럼 청렴하지 못하면 예차 이외에 또 사용私用의 말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니, 회계한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진경 등은 필시 조정의 뜻을 시험했을 리가 없으니, 파직하지 말라."
인조는 우선 이진경이 청렴하여 예비용 말까지 사사로이 쓰지 않고 바친 점을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병조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말을 돌려보내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어승마와 예차마 외에 더 말을 수탈하는 일이 생길까봐서'였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사사로이 말을 거두지 마라'고 말하면서 예비 어승마를 제주목사가 사사로이 쓰는 것을 공인, 양성화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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