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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이 시행되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 남부, 특히 남해안 일대의 촌락유적과
일본 큐수 북부의 소위 대륙계 야요이인 초기 정착촌,
이 두 촌락유적 주변에는 농지가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경작지에는 양측 모두 비슷한 비율의 논이 포진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한반도 남부의 촌락에 비해 후쿠오카 평원 일대의 정착촌은 논이 더 많은 모습이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경우 야요이 촌락 복원 모형이나 그림에서는 거의가 풍요로운 논으로 둘러싸인 촌락을 그리고 있더라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묘사가 그 쪽 발굴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반도 남부는 어떠했을까?
한반도 남부의 촌락 역시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을까?
양자간에는 재배하는 작물의 종류 별 비율 차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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